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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돛을 단 자전거’ 비상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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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돛을 단 자전거’ 비상을 꿈꾸다
  • 김형규
  • 승인 2018.02.05 08:53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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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의 좌충우돌 산티아고 자전거 순례] <9>바람과 태양의 나라, 스페인

전직 기자가 자전거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는 ‘김형규의  자전거 역사문화기행.’ 두 바퀴가 달려 만나게 되는 고장의 역사와 문화를 독자들에게 소개해왔습니다. 국내를 벗어나 세계로 눈을 돌린 필자는 뉴올리언스에서 키웨스트까지 1800㎞를 여행하며 ‘미국에서 세계사 들여다보기’를 연재했습니다. 이번엔 아들과 함께 하는 좌충우돌 산티아고 자전거 순례를 기록으로 남깁니다. 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바람과 태양이 강한 스페인은 도처에 풍력발전과 태양광발전시설이 들어서있다.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에서 에스테야(Estella)까지 거리는 20㎞. 이 구간은 길을 헤맬 일이 없다.

앞서 달려온 길은 도시의 거미줄 도로망을 통과하느라 혼선을 빚었지만 에스테야 가는 길은 12번 자동차전용도로 바로 옆을 따라가는 왕복2차선(NA 1110번)도로만 쫓아가면 된다. 통과하는 마을도 마녜루(Mañeru)-시라우키(Cirauqui)-로르카(Lorca)-비야투에르타(Villatuerta) 등 도보순례와 같다.

에스테야에 도착하니 벌써 오후 2시다. 전날부터 말썽을 부린 체인이탈 현상을 손보기 위해  시내 수리점을 찾아갔으나 문이 닫혀 있다. 시에스타다.

패스트푸드점이나 간이 판매점을 제외하고 대다수 점포는 불볕더위가 절정에 오르는 낮(대게 낮 12시30분부터 오후 5시30분)에는 문을 닫는다. 오랜 관행이고 대다수 손님이 쉽게 소통 가능한 이웃사촌이다 보니 큰 문제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 문제가 시급하긴 했지만 재개점 때까지 두 시간을 기다리기엔 갈 길이 너무 멀었다. 자전거 트러블을 해결할 기대감에 부풀었던 아들의 얼굴에 실망감이 드러났다.
“점포를 낮에 네댓 시간이나 닫는 건 한국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네요.”

한국에선 망하는 지름길이라 맞장구를 쳤지만 오후 내내 뙤약볕 아래에서 조선간장 땟국물에 절이는 듯한 혹독한 라이딩을 체감하고 나서야 스페인의 일상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뙤약볕 아래 낯선 스페인의 일상

아들이 뙤약볕 아래 포도밭과 올리브나무가 가득한 농촌도로를 외로이 달리고 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에스테야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로 늦은 점심을 대신했다. 산티아고 가는 길 주변 식당이나 카페, 매점은 순례자를 위해 인증 스탬프를 찍어주지만 체인점에는 그런 서비스가 없다.

오후 2시 30분 로그로뇨(Logroño)를 향해 출발했다. 로그로뇨까지는 50㎞, 당초 목표한 나제라까지는 60-70㎞남았다. 버거운 거리지만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볼 심산이었다.

지도상으로는 여전히 NA 1110도로만 붙들고 가면 된다. 이라체(Irache)-아스케타(Ázqueta)-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Villamayor de Monjardín)-로스 아르코스(Los Arcos)를 거치면 로그로뇨가 기다린다.

해발 720m인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만 넘어가면 나머지 구간은 수월해보였다. 도보순례자들은 이미 자취를 감췄다. 점심식사와 함께 뜨거운 날씨를 피해 순례를 마감하고 세탁, 시내 관광 등을 마친 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기 때문이다.
 
에스테야를 벗어나 들판 길을 달리는데 맞은편에서 한 무리의 자전거 여행객이 다가왔다. 멀리서 보기에도 핸들바백은 물론 앞뒤로 대형 패니어에다 트레일러까지 중무장한 라이더들이다. 지원차량도 보이지 않았다. 저 정도 채비면 라이더를 제외하고 자전거에 실린 무게만 해도 30㎏은 될 것 같았다.

급히 셔터를 누르는데 여성라이더 자전거에 연결된 트레일러에서 “까르르르” 웃음소리가 새나왔다. 옹알이에서 갓 벗어난 아기가 혼자 노는 소리였다. 아기를 트레일러에 태우고 자전거 여행에 나선 것이다. 엄마의 표정은 힘든 기색 없이 행복해보였다. 그 희열을 아기와 교감하는 듯했다.

아기와 함께 라이딩 하는 엄마의 행복

산티아고순례길을 반대로 라이딩하고 있는 3명 가운데 선두에 선 라이더.
두 번째 달리는 라이더는 노르웨이 여성이다. 자전거에 매달린 캐리어에 아기가 타고 있다.

산티아고 순례코스를 거꾸로 달리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그들은 이미 멀리 사라졌다. 단순한 가족여행일 수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꽁무니에 달린 깃발이 노르웨이 국기다.

유럽 북서부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인 노르웨이에서 비행기나 육로로 산티아고 길에 접근하기가 불편하다고 판단해 배편으로 스페인 서해안에 닿아 동쪽으로 산티아고길을 역주행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감동도 잠시,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의 고개를 넘으면서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아들이 라이딩을 멈추는 횟수가 늘고 그때마다 격한 숨을 몰아쉬며 물을 찾았다. 뜨거운 날씨 아래에서 탈수 증세가 시작됐다는 증거다.

둘째 날 라이딩을 시작한지 80㎞, 아직 40㎞정도를 더 달려야 로그로뇨를 볼 수 있다. 앞뒤를 번갈아가며 때리는 바람도 그렇지만 이글거리는 태양이 더 큰 문제다. 자전거라이딩의 가장 큰 장애물은 바람의 저항과 무더위다. 앞바람과 무더위가 함께 닥치면 체력 고갈은 순식간이다.

어느덧 시간은 오후 5시가 넘어가는데 여전히 우리는 오븐 속 열기에 갇힌 황량한 들판을 벗어나지 못했다. 갈수록 속도가 떨어졌다. 이 순간만큼은 아들에게도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없다. 내가 힘든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뿐이다.

경험상 불볕더위에 지친 상태에서 한줄기 뒷바람이라도 밀어주면 되도록 등을 크게 펴 공짜 추진동력을 얻으려 애쓴다. ‘등에 돛을 매달고 자전거를 타면 어떨까’라는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뒷바람이 불어주는 순간 돛을 활짝 펴면 하늘을 나는 기분이겠다는 상상에 피식 웃는다.

무역‧편서풍 타고 확산된 제국주의

도로 라이딩을 즐기는 스페인 시니어 라이더.

스페인은 바람과 태양의 나라다. 국토 곳곳에 태양광과 풍력발전시설이 깔려있다. EU 국가 중에서도 스페인은 풍력과 태양광을 이용한 재생에너지 분야에서 독일 다음으로 보급이 왕성하다. 스페인은 2012년 기준 총 전력 소비량의 16%를 풍력발전에서 얻는다고 한다.

스페인은 증기기관이나 내연기관이 나오기 이전 무동력시대에 바람을 앞세워 수세기 동안 세계를 제패한 ‘무적함대’였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가 1492년 범선을 이끌고 아메리카 카리브해에 도착한 사건 이후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서양의 우월주의에서 비롯된 역사왜곡이라는 게 정설이지만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뒤 자력으로 되돌아온 무동력 항해술만큼은 주목할 만하다. 이전 탐험가들은 아프리카 해안을 가시거리에 두면서 희망봉을 넘어 인도까지 항해했을 뿐 망망대해의 서쪽 대서양을 향해 배를 띄울 생각은 엄두도 못 냈다.

콜럼버스는 풍향과 해류에 대해 많은 연구와 노하우를 습득한 듯하다. 북아프리카 모로코 앞바다의 카나리아해류 변화를 유심히 관찰했을 것이다. 여기부터 무역풍을 따라 서쪽으로 흐르는 북적도해류 위에 범선을 띄우면 자연스레 신대륙에 갈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돌아올 땐 편서풍을 따라 동쪽으로 흐르는 북대서양해류를 타면 된다고 믿었다.

콜럼버스의 범선은 북위 30도에서 형성된 북동 무역풍을 타고 8000㎞나 떨어진 카리브해까지 항해해 아이티 원주민과 조우한 뒤 북위 60도까지 거슬러 올라가 편서풍을 타고 스페인으로 귀환했다. 콜럼버스의 신항로 개발은 앞서 포르투갈이 열어놓은 인도 항로와 맞물려 서양열강을 노예무역과 식민제국주의 각축장으로 끌어들였다.

잊힌 테네리페섬의 베르베르人 

TV프로그램 ‘윤식당2’ 배경지로 유명해진 스페인 테네리페섬은 모로코에 훨씬 가깝다. 스페인을 출발한 콜럼버스 범선은 카나리아 제도를 지나 시계방향(붉은선)으로 무역풍을 타고 아메리카에 도착한 뒤 편서풍을 타고 귀환했다.

요즘 인기리에 방영중인 TV프로그램 ‘윤식당2’의 배경은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에서 가장 큰 테네리페섬이다. 이 섬은 스페인 본토에서는 1000㎞이상 떨어져있지만 모로코에선 100여㎞로 가깝다.

무역풍의 시발점인 카나리아 제도는 당시 유럽 각국이 식민지를 개척하고 아프리카 노예를 거래하는 중요 전초기지였다. 모로코인과 같은 혈통의 베르베르인이 원주민이었으나 일확천금을 꿈꾸는 스페인 선원들과 유럽의 무역상들에 의해 쫓겨나고 섬은 스페인에 귀속됐다.

스페인은 카나리아제도는 물론 모로코 본토의 세우타, 멜리야 지역도 자국령으로 ‘알박기’했다. 이들 땅은 지금도 금싸라기 같은 항구도시이자 전략적 요충지이며 연중 천혜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스페인도 자국 영토에 있는 지브롤터를 영국에 ‘알박기’당하고 속앓이를 하긴 마찬가지다.

스페인의 풍력발전 투자는 최근 경기부진으로 잠시 주춤하는 듯하다. 과거 스페인이 무역풍과 편서풍을 오남용한 탓에 세계 여러 나라는 식민지배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콜럼버스 이후 5세기가 지난 지금 스페인이 인류의 행복을 위해 풍력과 태양열에너지 확보에 주도적으로 나서준다면 또 다른 세계사의 주역으로 재평가 받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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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ak 2018-02-06 14:18:42
'이 순간만큼은 아들에게도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없다. 내가 힘든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 뿐이다.' 저도 부모가 되어보니 이 대목이 와 닿네요
앞으로의 여정에서도 부정을 느낄 수 있는 에피소드 기대할께요^^

조용만 2018-02-05 16:22:15
돛을 단 자전거에 등짝을 펴고
신나게 달리고 싶은 충동이 생기네요

순례자의 길을 그리면서
신명나는 한 주 보내세요..^^

용이 2018-02-05 10:59:03
글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KusenB 2018-02-05 10:48:18
무더위를 피하는 시에스타처럼 오늘 같이 추운 겨울엔 긴 휴가를 내고 따뜻한 남쪽으로 떠나기도 하죠... 요즘 같은 추위엔 참 부러운 여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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