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댓글
변상섭, 그림속을 거닐다
세종시교육청 공동캠페인
평범하지만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산티아고
상태바
평범하지만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산티아고
  • 김형규
  • 승인 2018.01.08 10:09
  • 댓글 1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좌충우돌 산티아고 자전거 순례] <5>퍽퍽한 인생 피레네 산길

전직 기자가 자전거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는 ‘김형규의  자전거 역사문화기행.’ 두 바퀴가 달려 만나게 되는 고장의 역사와 문화를 독자들에게 소개해왔습니다. 국내를 벗어나 세계로 눈을 돌린 필자는 뉴올리언스에서 키웨스트까지 1800㎞를 여행하며 ‘미국에서 세계사 들여다보기’를 연재했습니다. 이번엔 아들과 함께 하는 좌충우돌 산티아고 자전거 순례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에로(Erro) 고개의 포장마차. 산티아고 순례자들을 위해 쉼터 겸 음료수 등을 팔고 있다. 도보순례자는 이지점에서 차도를 가로질러 간다. 구글 스트리트뷰에는 안 나오는 걸로 봐서 최근에 생긴 듯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들의 컨디션 난조가 아니었다. 자전거 체인이 벗겨지는 문제였다.

아들이 타는 미니벨로는 자전거여행을 위해 지난해 새로 구입한 것이다. D사의 신제품으로 디자인이 심플하고 무엇보다 무게가 8㎏대라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내장기어나 여러 장의 체인링을 달지 않고 1장의 체인링을 쓰는 대신 뒷바퀴에 11장의 스프라켓을 달았다.

문제의 체인링.

체인링에 덧붙여야 할 배시링(Bashring•체인 벗겨지지 않고 기름이 묻지 않게 다는 보조 장치)마저 무시했다. 이 자전거를 아들에게 양보하고 나는 동호인에게 빌려온 중급 미니벨로를 타고 산티아고 길에 올랐다.

배시링이나 체인가이드 없이 11단 기어를 변속하면 좌우 이동 폭이 커 체인이 이탈할 우려가 높았으나 미니벨로 전문업체로 정통한 D사가 이깟 것쯤은 극복했을 것으로 믿었다. 국내에서도 간혹 체인이 벗겨져 스페인에 오기 전 전문 매장에 맡겨 문제가 해결된 줄 알았다. 비행기에 싣고 다시 조립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도진 듯하다.

체인을 제자리에 끼우고 손에 묻은 검은 기름때를 박박 문지르며 1회성 트러블이길 바랐으나 이후에도 아들은 서너 차례 나를 급하게 불러 세웠다. 첫날 라이딩의 긴장감에다 자전거까지 말썽을 부리자 신경이 곤두섰다. 이러다가 8일간 내내 체인 기름때만 묻히다 끝장날 것 같았다. 배시링만 장착했어도 해결될 문제였는데 나도 모르게 ‘ㅆ’이 튀어나왔다.

피레네산맥을 넘어가는 도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산살바도르 소성당’ 종탑에서 아들이 저체온증에 떨고 있다.

4시간 만에 정상 도달. 안개와 추위뿐

달리 방법이 없어 임시방편으로 아들 자전거와 내 자전거를 바꿔 타기로 했다. 경험상 체인이 이탈하는 경우는 변속하는 순간이다. 변속하기 직전 다리 힘을 빼고 체인 이탈 여부를 눈으로 천천히 확인해가며 페달을 앞뒤로 움직이면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다. 다만 변속을 할 때 잠시 주춤했다가 가야 하는 맹점은 감수해야 한다.

라이딩의 맥을 끊는 문제는 일단 봉합이 됐지만 아들은 종전에 비해 투박한 자전거를 타야했고 나는 변속할 때마다 다리 근육의 완급을 조절해야 하는 체력낭비와 번거로움을 겪었다.

4시간을 업힐한 끝에 피레네 도로(N-135) 정상에 도달했다. 첫 번째 큰 난관을 참고 따라와 준 아들이 대견했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과정은 지난 20년 가까이 자전거를 타면서 겪은 희로애락의 축소판 같았다.

피레네산맥을 넘어가는 도로변 가장 높은 곳에 지어진 산살바도르 소성당 종탑에서 아들과 함께 셀카.
산살바도르 소성당 옆으로 난 산티아고 순례길을 따라 도보순례자가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산살바도르 소성당 인근 이름 모를 비석에서. 근처에 유명한 롤랑의 기념비는 짙은 안개와 추위로 찾기를 포기했지만 뒤쪽 안개 속에 어렴풋이 보인다.

해발 고도를 알려주는 도로표지판(Ibañeta 1057m)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인근 ‘산살바도르 소성당’으로 자리를 옮겨 바나나와 빵으로 간단히 요기를 했다.

낮 12시가 다됐는데도 주위는 안개가 짙게 깔렸다. 라이딩을 멈추자 금세 한기가 온몸을 엄습했다. 주변에 전설적인 롤랑의 기념비가 있었지만 찾는 걸 포기했다. 안개와 추위 때문에 오래 머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론세스바예스까지는 급하강길이다. 나머지 팜플로나까지 60㎞는 오르막이 두어군데 나오지만 전반적으로 완만한 내리막이다.

‘피똥싸게’ 올라왔건만 다운힐은 ‘찔끔’

찬바람을 헤치고 피레네산맥을 내려와 맞이한 첫마을 론세스바예스. 한기에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다.

내리막을 달리는 동안 찬바람이 들어오지 않게 방풍재킷을 단단히 여몄다. 산티아고에서 처음 경험하는 다운힐인 만큼 아들에게 주의를 재차 당부했다.
‘내리막 커브가 나오면 반드시 미리 감속할 것과 전방의 노면상태를 예의주시할 것.’

미니벨로를 가져오면서 걱정했던 게 내리막이다. 바퀴가 작은 만큼 노면의 작은 패임이나 돌출, 돌멩이에 민감하다. 내리막 사고는 치명적이다. 아들은 이미 국내 연습라이딩 중 내리막에서 사고를 당한 경험이 있다. 그렇다고 무작정 브레이크만 잡을 수 없는 게 내리막길이다. 오르막은 힘으로 승부할 수 있지만 내리막은 테크닉이 중요하다.

멋진남님은 아직 정상에 도착하지 않았다. 일단 론세스바예스까지 먼저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산티아고 순례자 여권.

안개를 파도처럼 헤쳐 나가면서 내리막을 재촉했다. 언제나 변화무쌍한 건 산중 날씨다. 다운힐을 시작하자마자 자동차 앞 유리 김 서림이 사라지듯 빠르게 안개가 걷혔다. 암전에서 스포트라이트가 켜지듯 답답했던 도로 앞에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불과 1백여m의 고도차인데도 방금전 안개에 잠긴 산살바도르 소성당의 분위기와는 딴판이었다.

내리막길을 탄 지 1분정도밖에 안됐는데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아담한 마을이 나타났다. 론세스바예스다. 피레네 산맥 능선을 가운데 둔 남쪽과 북쪽의 차이다. 업힐을 했던 북쪽의 음습한 산등성이에 비해 남쪽은 햇볕이 잘 들어 해발 900m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집 한 채 찾아 볼 수 없는 험준한 산길을 엉덩이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4시간이나 죽어라 페달링을 해서 올라왔건만 내리막이 순식간에 끝난 게 허무했다. 자전거족들이 오르막을 힘겹게 오르는 이유는 신나는 내리막에서 보상을 받는다는 믿음 때문이다. 등산이나 마라톤에선 기대할 수 없는 자전거만의 보상이다.

피레네는 30여㎞를 업힐해놓고 내리막은 론세스바예스까지 1-2㎞만에 끝났다. 해발 900m의 론세스바예스 이후 도로는 줄곧 농촌마을 사이를 달려 편안하게 다운힐을 하기에는 부적당했다.

그러고 보니 피레네 자전거코스는 현대인의 가시밭 인생사와 일맥상통한다. 20-30년간 한 조직에서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았지만 정점에 오르자마자 자리를 빼앗겨 급전직하 추락할 수밖에 없는 동시대사람들. 좌고우면하지 않고 앞만 보고 불도저처럼 충성하며 올라온 이들이 하루아침에 고꾸라지는 허무함. 제2의 도전으로 부활을 꿈꾸지만 준비해 놓은 게 하나도 없는 먹먹한 현실처럼.

론세스바예스 수도원 입구.

잘나가는 권력자는 올 수 없는 산티아고

인생 최고의 절정기를 누리는 권력자나 억만장자가 산티아고 순례에 나설 일은 없다. 설사 오더라도 감흥을 느끼지 못하거나 견디지 못하고 이탈할 것이다. 산티아고를 찾는 대부분 순례자들은 삶을 성찰하고 제2의 인생을 준비하려는 평범하지만 상처 받은 사람들이다.

나와 아들도 제2의 인생 앞에서 또는 복학에 앞서 향후 전개될 전장(戰場)같은 인생을 어떻게 준비할지 각오를 다지기 위해 왔다.

순례자들은 산티아고길을 따라가는 동안 자연스레 사색에 빠진다. 무엇을 할 것인지 보다는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고개를 숙인다. 케케묵은 필름 조각이 풀물에 얼기설기 엉겨 붙어 돌아가듯 그동안 달려왔던 인생사가 순간순간 중첩돼 오버랩된다. 영광스런 장면보단 미처 주변을 헤아리지 못하고 외면했던 기억에 자책한다.

론세스바예스에서 팜플로나로 가는 시골 마을 라이딩.
론세스바예스에서 팜플로나로 가는 시골 마을 라이딩.
론세스바예스에서 팜플로나로 가는 시골 마을 라이딩.

성공은 개인 능력 아닌 주변 도움

많은 사람들은 지난해 투르 드 프랑스 우승자 크리스토퍼 프룸이 현존하는 최고 사이클 선수라 여긴다. 사이클 대회는 개인기록경기이지만 동료들의 팀워크 없이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는 단체경기이기도하다.

프룸은 그가 속한 ‘팀 스카이’ 팀원들이 없었다면 챔피언이 입는 옐로저지를 획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출전선수들은 결승점을 몇 킬로 앞둔 지점부터 집결해 소속 팀의 에이스를 바람의 저항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앞서 나간다. 보호막을 앞세운 덕에 에이스는 무풍지대에서 체력을 아껴뒀다가 막판 스퍼트에서 용수철처럼 뛰쳐나갈 수 있다. 에이스의 성공여부는 바람막이의 역량에 달린 것이나 다름없다.

실화에 근거한 영화 ‘마이 산티아고(나의 산티아고)’에서 주인공 하페는 코미디언으로서 크게 성공한 원인이 자신의 재능과는 무관했다는 걸 산티아고 순례 중 깨닫는다. <계속>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BWS 2018-03-01 15:37:10
장비불량...장비불량.... 여행내내 욕하셨을듯....ㅡㅜ

Jin 2018-01-16 16:27:14
올라가는건 힘, 내려올 때는 테크닉. 인생의 진리를 느끼고 갑니다~

문경만 2018-01-09 22:28:49
저도 두 아들이 장성하면 꼭 따라 해보고 싶습니다^^*

Kwak 2018-01-09 18:31:35
이번 여행을 통해 많은 깨달음을 얻으셨네요
앞으로 펼쳐질 제2의 인생에 권투를 빌며!
다음편도 기대할께요^^

김종선 2018-01-09 10:18:35
정점에서 잘 짤렸어요 ㅎ
안그랬음 어찌 평생 아들과 같이 산티아고를 갈수있겠어요
산티아고 라이딩코스가 대충 관광이나 하면서 설렁설렁 타는코슨줄 알았드만 생각보다 엄청빡쎈 코스구만요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