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멈춤’을 깨닫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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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멈춤’을 깨닫기까지
  • 김형규
  • 승인 2018.01.01 17:28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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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의 좌충우돌 산티아고 자전거 순례] <4>1일차 생장-팜플로나

전직 기자가 자전거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는 ‘김형규의  자전거 역사문화기행.’ 두 바퀴가 달려 만나게 되는 고장의 역사와 문화를 독자들에게 소개해왔습니다. 국내를 벗어나 세계로 눈을 돌린 필자는 뉴올리언스에서 키웨스트까지 1800㎞를 여행하며 ‘미국에서 세계사 들여다보기’를 연재했습니다. 이번엔 아들과 함께 좌충우돌 산티아고 순례를 시작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첫날 생장에서 팜플로나까지 달린 궤적(파란선). 위쪽 빨간 원이 길을 잘못 들은 부분. 노란 선이 나폴레옹루트, 노란 선이 끝나는 지점이 N-135번 도로 정상, 녹색지점이 론세스바예스다.

‘언제 국경을 통과했지.’
이국의 정취를 심호흡하면서 페달링을 하다 어느 순간 스페인 땅이라는 걸 깨달았다. 국경선에서 기념사진이라도 찍을 요량이었는데 언제 경계선을 넘었는지 모르겠다.

지도를 보면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은 N-135번 도로를 따라 한동안 계속된다. 삼엄한 초소의 경비병이나 세관원, 여권을 보자는 경찰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국경. 거리낌 없이 이웃 동네 마실 다니듯 하는 이 지역민들에게 남북한 휴전선이나 미국-멕시코 장벽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일부 유럽 사람들에게 국가나 국경, 애국심은 부자연스럽다. 스페인 역시 카탈루냐나 바스크 지역은 독립욕구가 강하게 내재돼 있다. 국가라는 프레임보다는 지역 공동체를 중시한다. 지역을 연고로 하는 유럽의 축구경기를 ‘전쟁’에 비유하는 이면에는 ‘애국심’이 아닌 ‘애향심’이 스며있다.

프랑스인지 스페인인지 구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도로표지판 활자뿐이다. 그마저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EU(유럽연합)란 이런 것이다.

아들은 무릎보다는 날씨를 더 걱정하는 눈치다. 산중의 고즈넉함과 짙게 깔린 안개, 보슬비는 생전 처음 겪는 라이딩 환경이다. 정상에 올라가면 저온과 궂은 날씨에 저체온증으로 심각한 상태에 이를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장경인대증후군 따위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나보다.

국경선 없는 EU, 부러울 수밖에

출발 전날 식사를 했던 생장의 레스토랑. 많은 순례자와 현지 주민들이 앉거나 서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조금 전까지 안경렌즈에 맺힌 빗물 때문에 시야가 가려 애를 먹었으나 차츰 빗줄기가 잦아들면서 오히려 자전거타기 좋은 환경으로 변했다. 쉬지만 않는다면 선선하고 흐린 날씨가 더 낫다. 태양열은 갈증과 체력소모만 부추긴다.

중간 중간 가다서기를 반복하며 아들의 상태를 살폈다. 힘들 때 복용하기 위해 한국에서 가져온 에너지겔 몇 포를 건넸으나 아들은 먹지 않았다. 업힐 도중 자주 멈추기는 피레네 산중이 처음이다.

자전거에 한창 재미를 느낄 무렵 남들보다 먼저 정상에 올라가 헉헉거리며 뒤따라 올라오는 동호인들의 피눈물 나는 사진을 찍어주는 것으로 은근 우월감을 과시했던 적이 있다. 누구나 같은 욕구일 것이다.

자전거는 평등의 상징이며 외부의 도움 없이 온전히 자신의 힘과 기술만으로 움직여야 하는 순백의 스포츠로 보였다. 자전거를 타는 동안 나이나 재력은 필요 없다. 누가 먼저 도착하느냐에 따라 서열이 매겨져야 한다고 믿었다. 레이싱의 희열과 시간단축에 매료돼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렸던 시절이었다. 자전거는 한번 정지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와 큰 격차가 벌어진다. 언덕에선 정지 후 출발이 더욱 어렵다.

앞만 보고 전력 질주하다가 어느 날 좌우로 눈길을 돌리는 스스로를 발견했다면 자전거를 ‘잘 타기’에서 벗어나 ‘멋지게 타기’를 알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휙, 지나치기보다는 되돌아와 주변의 일상을 살펴보는 여유야말로 자전거를 타는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라는 걸 감지하게 됐다. 마치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 주인공 산티아고가 ‘자아의 신화’를 찾아가는 것처럼.

‘잘 타기’와 ‘멋지게 타기’

비가 많이 내리자 안전 라이딩을 위해 자전거 상태를 점검하느라 도로변에 잠시 멈췄다. 맨 아래 ‘산티아고 길(Chemin de St. Jacques)’이라는 프랑스어 표지판이 보인다.

자전거에선 ‘자아의 신화’를 ‘위대한 멈춤’에 견줄만하다. 지금은 불명예의 대명사가 됐지만 ‘사이클의 황제’ 랜스 암스트롱과 만년 2인자 얀 울리히의 대결은 스포츠뿐만 아니라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팁을 던져준다.

2003년 투르 드 프랑스 결승점을 앞두고 1위를 달리던 암스트롱은 관객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뒤이어 달리던 울리히는 넘버원을 꺾을 절호의 기회를 잡았으나 암스트롱이 다시 일어나 정상적으로 달릴 때까지 페이스를 늦춰 뒤쫓아 갔다. 울리히는 또 한 번 넘버투 신세를 면치 못했지만 모두들 그의 페어플레이를 ‘위대한 멈춤’으로 칭송했다.

이후 암스트롱은 금지약물복용으로 모든 타이틀을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었고 울리히는 영원한 2인자가 아닌 최고의 스포츠맨으로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다.

아들은 아비의 걱정을 눈치 챘는지 최대한 몸에 힘을 빼고 가볍게 페달링을 하는데 주력했다. 일정하게 들숨과 날숨을 크게 쉬면서 체력을 아껴가며 전진했다. 평소엔 듣는 둥 마는 둥하더니 막상 비상상황이 닥치니 생존에 필요한 기억을 끄집어 낸 것이다.

누구나 힘들다, 표현만 안할 뿐이지

비가 소강상태를 보이자 멋진남님이 방풍 자켓을 벗어버리고 힘찬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생장에서 피레네를 넘어 스페인 론세스바예스로 연결되는 N-135번 도로변에 설치된 산티아고순례길 안내판.

출발한지 2시간여가 지났을 즈음 무릎 상태를 물었다.
“무릎은 괜찮은데 엉치가 아파요.”
“누구나 마찬가지다. 괜찮은 척 할 뿐이지.”

이 정도면 아들은 안정권에 들어선 것 같았다. 가시거리 권에 있는 아들보다 멋진남님이 걱정이다. 얼마나 뒤처져서 쫓아오는지, 초반부터 아예 포기한 건 아닌지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 답답하다.

멋진남님은 5일전 인천공항에서 처음 만나 같이 생활하면서 한국현대사의 전형적인 아버지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어려운 형편에 교육도 많이 받지 못하고 일찌감치 고향인 경상도에서 강원도 삼척으로 이사해 안 해본일 없이 온갖 고생을 다했다고 한다.

피레네를 넘어가는 도로에서 만난 달팽이. 우리나라 달팽이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다.
우천으로 나폴레옹 루트로 가지 않고 도로를 따라 연결된 보행자길을 걷는 순례자(왼쪽)와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들.

선천적으로 좋은 체력을 타고나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산악구조대원으로 자원봉사를 하며 조난을 당한 등산객들을 구하는데 앞장섰다. ‘멋진남’이라는 닉네임은 삼척 자전거동호회원들이 손주 볼 나이에도 청춘처럼 멋지게 산다고 해서 붙여준 애칭이란다.

혹시나 하고 닉네임이 있는지 물어본 나에게 되돌아온 “멋진남”이란 대답은 너무도 꾸밈없는 어휘의 조합이어서 듣자마자 아들과 함께 폭소를 터뜨렸다. 그는 산악구조대원으로 종횡무진 산을 탄 후유증으로 무릎 연골이 다 닳아 없어진 걸 아쉬워했다.

빈틈없었던 일상 속에서도 가톨릭은 큰 위안이 됐다. 산티아고 라이딩중에 성당을 만나면 항상 안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성호를 그었다. 그는 나와 아들을 하늘이 내려 보내주신 ‘야고보’라고 말했다.

4시간 만에 도착한 피레네 N-135번 도로 정상. 현지시간으로 낮 12시가 다 됐지만 마치 새벽인 듯 안개가 짙게 깔리고 체감온도도 낮았다.

“동생(필자)하고 아들 없었으면 이 나이에 혼자 여길 어떻게 오나.”
우리에겐 서로가 야고보가 아니었을까.

멋진남님 걱정에 아들 생각은 잠시 뒷전으로 미뤄둔 사이에 “아빠, 아빠!”하는 다급한 소리가 났다.
‘아! 장경인대!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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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 2018-01-03 14:44:37
위대한 멈춤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했습니다.
근데 이거 글 끊어짐이 거의 아침 드라마 수준이네요!
다음편도 기대하겠습니다!!

kusenb 2018-01-03 00:02:51
아..
나도 모르게 빠져서 읽었습니다
긴장감 있는 타이밍에 끊으셔서 다음편이 기다려지네요

조용만 2018-01-02 10:58:58
아들과의 순례자의 길..라이딩
정말 부럽고 부럽습니다
다음편을 기대하면서...

새해에도 계속 건승하세요..^^

송인걸 2018-01-02 10:03:09
읽는 순간 현장감이 살아납니다.
오르막 산길에 비바람은 몰아치고. 맞바람을 이기며 구르는 패달이 얼마나 무거운지.
그래도 신뢰하는 아들이 있고 힘이 되는 멋진남이 계셔서 외롭지 않은 길.
교감하는 소중함을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건강하세요.

김동준 2018-01-02 07:59:01
아들과 함께 어려움을 이겨내며 순례길을 달리는 멋진모습이 그려 집니다
멋진 아빠와아들 화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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