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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미술 속 ‘사랑의 알레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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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미술 속 ‘사랑의 알레고리’
  • 유현주
  • 승인 2017.10.11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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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주의 문학과 미술사이] 단테의 ‘신곡’과 로세티의 ‘베아트리체’
유현주 미술평론가 | 미학박사

“우리 인생길 반 고비에 | 어두운 숲에 들어서서 난 | 올바른 길을 잃은 걸 알았네.”
(Nel mezzo del cammin di nostra vita mi ritrovai per una selva oscura, ché la diritta via era smarrita.)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최고의 시인이자, 14세기 르네상스 인문주의 지평을 연 대문호 단테 알리기에리의 역작 <신곡(Divine Comedia)>은 위에 적힌 시 구절처럼 하나의 고백에서 시작한다.

<신곡>, 사랑의 알레고리 풀어낸 신성한 희극

시의 구절처럼 단테는 길을 잃고 헤매다가 살아 있는 사람으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의 순례 길을 떠나게 된다. 지옥에서 출발해, 연옥을 거쳐 천국으로 상승하는 이 순례 길은 하나님의 빛과 마주하는 체험에서 종결된다.

신의 빛으로 구원을 얻은 단테. 그는 천국에서 현실 속 작가의 모습으로 돌아와 이 모든 체험을 기억하며 1만 4233행의 서사시를 완성한다. 18년간 정치적 유배자의 삶을 사는 동안이다. 물론 그 여정이 행복한 결말이기에 희극(코메디아)이라고 단테는 부른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의 삽화, 귀스타브 도레, 1861년. “우리 인생길 반 고비에 | 어두운 숲에 들어서서 난 | 올바른 길을 잃은 걸 알았네.”라는 구절이 쓰여 있다.

이처럼 <신곡>은 기독교적 사랑과 구원에 대한 단테의 염원이 담긴 서사시다. 무엇보다 35세의 나이로 정치계에서 추방당해 유배자의 삶을 살던 단테는 이 작품을 통해 삶의 아픔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한 구도자의 모습을 각인시켰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 단테의 이 작품은 한 여인에게 바치는 사랑의 세레나데와 같은 느낌을 준다. 베아트리체는 젊은 시절 단테가 사랑한, 그러나 결합하지 못한 채 먼저 세상을 떠난 여인이다. 강렬한 그리움은 단테에게 죽음보다 더한 지옥과 연옥의 참혹한 광경들을 지나 그녀를 만날 수 있는 천국으로 가는 여정에 용기를 갖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베아트리체는 어떤 여인인가? 일설에 의하면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상상 속의 여인으로, 문학적 영감의 산물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구체적인 정황들은 베아트리체가 실존인물임을 증명하고 있다.

피렌체의 유수한 귀족 가문 출신인 단테가 포르티나리 집안의 딸인 베아트리체를 만난 것은 9세 때였다고 한다. 5월 포르티나리 집안의 축제에 가족을 따라 참가했던 어린 단테에게 베아트리체와의 영혼적인 만남은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된다.

그로부터 9년 후 단테는 우연히 아르노 강의 베키오 다리에서 그녀와 조우한다. 그것이 두 번째의 만남이지만 그에게는 평생의 마음 속 연인이 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서로 맺어지지 못한 채, 1284년 베아트리체는 한 은행가와 결혼하고 1285년 단테는 다른 여인을 만나 각각 결혼한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24살의 나이로 베아트리체가 죽고 1년이 지나고서야 단테는 자식을 가졌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단테가 지옥의 가장 심장부에 베아트리체의 아버지 포르티날리를 떨어뜨린다. 그 이유는 고리대금업자와 마찬가지로 탐욕의 죄를 범해서이기도 하지만, 포르니탈리가 자신의 딸을 돈 많은 금융가와 결혼시켰던 데에 대한 복수라는 추측을 낳는다.

어쩌면 불륜의 감정일 수도 있는 단테의 사랑은 짝사랑 혹은 중세의 ‘궁정식 연애’와 같은 비밀스러운 방식이었던 것 같다. 마치 중세의 기사들이 귀족 부인에게 보답 없이 사랑과 찬양을 바치는 연애감정 말이다. 그처럼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을 단테는 자신의 문학 안에서 완성시키고자 했던 것 같다.

당시 중세의 정서로 보면 사랑의 감정은, 특히 다른 배우자를 사랑하는 감정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죄일 수밖에 없다. 단테는 이러한 사랑을 결국 정신적이고 숭고한 사랑으로 승화시켜 <신곡>에 담아냈다.

베아트리체와의 만남은 얼마나 큰 모험과 고통의 과정을 거쳐 얻어지는가? 단테는 불의와 악행으로 영원한 형벌을 받는 지옥, 자신의 영혼을 정죄함으로써 구원의 계기를 얻는 연옥을 거쳐 자신이 사랑한 베아트리체를 만난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녀의 안내로 신의 빛이 온존하는 천국에 도달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천국에서 만난 베아트리체는 단지 단테가 사랑한 여인이라는 의미를 넘어선다. 베아트리체는 세속적 의미의 사랑을 넘어, 사랑의 이데아와 같은 것, 순결하고 지고한 사랑, 구원, 신의 절대적 사랑의 알레고리가 된다.

연옥을 만든 이유, 인류애와 자신의 구원을 위해

단테의 <신곡> 31장의 삽화, 최고천(最高天)을 응시하는 단테와 베이트리체, 귀스타브 도레, 1892년.

천국과 지옥은 도대체 어디에 어떤 모양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연옥은 또 어떤 곳인가?

“여기로 들어오는 모든 자들은 희망을 버릴 지어다”라고 적힌 지옥의 입구에서 천국까지 단테는 거대한 천체를 그리듯 상상해낸다.

지옥은 깔때기 모양의 거대한 심연으로 향한 지하의 세계이다. 지옥은 악마 루시퍼가 하늘에서 추락하면서 땅속을 뚫어 놓은 곳이며,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아홉 개의 영역으로 이루어진다.

제1옥의 림보, 즉 지옥의 시작이지만 완전한 지옥은 아닌 곳과 제2옥에서 제5옥까지 상부지옥, 제6옥에서 제9옥까지 하부지옥으로 구분된다. 천국은 지구를 싸고 도는 9개의 하늘 너머의 정화천(淨化 天)으로 단테는 묘사한다.

그런데, 연옥은 도대체 왜 필요한 것일까? 단 한 번의 생에서 구원을 받을 기회를 박탈당한, 혹은 놓친 자들에게 주어지는 연옥이란 장소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런 점에서 당시의 상승하는 중간계급, 상인계층 등 신흥자본주의를 이루는 공동체를 껴안고자 하는 단테의 사랑의 알레고리가 아닐까?

실로 <신곡>에서 묘사하는 연옥은 모종의 희망의 기운이 흐른다. 순례자들은 행렬을 이루면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앞으로 나아가는데, 이들의 목표는 지상낙원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옥은 제2의 지옥이라기보다 천국으로 가는 징검다리인 셈이다.

중세의 엄격한 교리에서 보자면, 천국과 지옥 이외에 연옥을 허가하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기독교적 교리에 따르면, 이미 원죄가 있는 인간이 정죄의 장소(purgatorium), 즉 연옥에서 구원받을 기회를 갖는 것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연옥을 통해 단테는 진정 인류보편에 대한 구원 같은 것을 바란 것일까?

어쩌면 당시 중세 기독교의 윤리적 관점에서, 자신이 베아트리체를 마음속으로 품어온 것조차 용서받아야 할 것이라면, 단테는 마음속으로 연옥이란 여과장치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가 그린 베아트리체

‘축복받은 베아트리체’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캔버스에 유채, 86.4㎝×66㎝, 1864-1870년경, 테이트모던(영국 런던)

베아트리체는 <신곡>을 통해 단테의 연인이자 지고한 사랑의 상징으로, 나아가 신의 사랑의 화신으로 알레고리화된 인물이다.

알레고리(Allegory)는 직접적으로 대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말하는 방식이다. 그리스어로 ‘다른(allos)’과 ‘말하기(agoreuo)’의 단어합성이다. 예컨대 뱀을 뱀이 아니라 사탄으로, 백합을 꽃이 아니라 순결을 나타내는 식의 비유법이다.

영국의 19세기 낭만주의시기 화가이자 시인이었던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는 자신을 <신곡>의 저자 단테와 종종 동일시하던 천재적 재능의 화가였다. 로세티는 당시 라파엘전파, 즉 르네상스 시대 화가 라파엘(1483-1520) 이전으로 돌아가서 19세기의 공업화된 영국과 달리 자연을 노래한 이전의 자연을 노래하고자 한 작가들 중 하나이다.

이름마저도 문학가 단테와 비슷한 화가 로세티는 <신곡>으로부터 영감 받은 작품 <축복받은 베아트리체>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축복받은 베아트리체>는 로세티가 자신의 아내 엘리자베스 시달을 이상화하여 그린 초상화이지만, 단테의 베아트리체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아내를 모델로 했지만 화가 로세티가 생각하는 <신곡>의 베아트리체는 관능적이면서도 신성성을 갖춘 묘한 분위기를 발산한다.

무엇인가를 명상하는 혹은 도취된 듯한 베아트리체의 뒤쪽에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피렌체를 배경으로 마주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머리에 후광을 두른 붉은 새는 시달의 손에 양귀비꽃을 떨어뜨린다. 실제로 작품 속 양귀비꽃은 화가 로세티의 부인인 시달이 지나치게 의존했던 아편의 원재료로, 흔히 죽음 혹은 영원한 잠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아내와 베아트리체를 일치시킴으로써, 로세티는 마치 단테가 그런 것처럼, 세속의 사랑을 성스런 사랑으로, 감각적 사랑을 정신적 사랑으로 고양시키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어쩌면, 문학가 단테나 화가 로세티 모두 평생을 함께 하지 못한 사랑의 완성을 성녀의 이미지로 박제화 하여 영원히 자신들의 가슴 속에 지니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사랑은 그처럼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 된다. 단테와 로세티가 탄생시킨 불후의 예술작품 안에서. 그러므로 단테의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은 단순히 기독교적 사랑의 이념으로 고정된 것이 아닌, 여기 현대인들의 가슴 속 아르노 강물을 굽이치며 흐르는 영원한 사랑의 세레나데로 회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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