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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과 가문을 위해 죽기로 작정한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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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과 가문을 위해 죽기로 작정한 여인
  • 박한표
  • 승인 2017.08.11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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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표의 그리스로마신화 읽기] <21>고결한 이피게네이아
박한표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 | 문학박사

이피게네이아는 아가멤논과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딸이다. 에우리피데스의 <이피게네이아>를 살펴보기 전에 우선 트로이 전쟁을 이해해야 한다.

아가멤논은 트로이 전쟁의 그리스 총사령관이 되어 아울리스 항에서 출항을 준비한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트로이전쟁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자신의 동생이자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를 꾀어 간 사건에 복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가멤논이 아울리스 항 근처에서 사냥을 하다가 사슴 한 마리를 잡는다. 그 후 그리스 함대는 출항 준비가 다 끝나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한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언가 칼카스를 통해 신탁을 물어보니 아르테미스 여신이 아끼는 사슴을 죽인 아가멤논에게 화가 나 바람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돌림병이 연합군을 괴롭히도록 한 것이다. 게다가 여신의 분노를 풀기 위해서는 아가멤논이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바쳐야 했다. 아르테미스가 처녀신이기 때문에 처녀를 산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아가멤논은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큰딸 이피게네이아를 아킬레우스와 결혼시키려 한다고 거짓말을 하며 큰딸을 아울리스 항으로 보내라고 전령을 보냈다. 이 말을 믿고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어린 아기였던 아들 오레스테스를 안고, 사랑하는 딸 이피게네이아를 남편에게 직접 데리고 온다.

안젤름 포이어바흐의 ‘이피게네이아.’ 왼쪽이 첫 번째 버전(캔버스에 유채, 174×249㎝, 1862년, 독일 다름슈타트 헤센 주립미술관)이고 오른쪽이 두 번째 버전(캔버스에 유채, 200×132㎝, 1871년, 독일 슈투트가르트미술관)이다.

이피게네이아는 아버지가 자신을 아킬레우스와 결혼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르테미스의 제물로 바치려고 불렀다는 사실을 알고 처음에는 큰 충격에 빠져 죽음의 공포로 전율한다. 그러나 이피게네이아는 깊은 고민과 성찰 끝에 자신의 운명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 곧바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다.

그녀는 자신에게 고향인 아르고스의 운명뿐만 아니라 전 그리스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신탁을 거절하면 납치당한 헬레네의 원수를 갚아 그리스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트로이로 떠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그리스 병사들이 분노하여 아버지 아가멤논과 더불어 자신도 죽일 것이다. 급기야 그들은 아버지가 다스리는 아르고스의 모든 처녀들을 겁탈할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이피게네이아는 당당하게 자신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죽기로 작정하면 살 길이 열린다고 했던가. 아르테미스 신전의 사제가 이피게네이아의 목에 칼을 대려는 순간이었다. 아르테미스 여신은 불쌍한 생각이 들었는지 짙은 안개로 주위를 어둡게 하고는 암사슴 한 마리를 남기고 재빨리 이피게네이아를 낚아채 타우리스에 있는 자신의 신전으로 데려가 여사제로 삼는다.

‘이피게네이아의 희생’ 샤를 드 라포스, 캔버스에 유채, 224×212㎝, 1680년, 프랑스 베르사유궁전(Grand appartement du Roi : Salon de Diane).

세월이 흘러 어머니를 살해하고, 복수의 여신들(에리니에스)에 의해 쫓기던 이피게네이아의 동생 오레스테스는 아폴론의 도움으로 아레이오스 파고스에서 무죄 판결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일부 판결에 불만을 품은 복수의 여신들에 의해 심한 광기에 시달린다. 오레스테스가 광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탁을 물어보니, 타우리스 섬에 있는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그리스로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탄탈로스 가문의 저주도 풀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레스테스는 친구이자 외사촌인 필라데스와 함께 타우리스 섬으로 향한다.

토아스 왕이 다스리는 그 섬에는 이방인이 잡히면 아르테미스 신전에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섬에 도착한 오레스테스 일행은 군인들에게 잡혀 꼼짝 없이 죽을 운명에 처한다. 그들이 아르테미스 신전으로 후송되어 제물로 바쳐지기 전, 여사제 이피게네이아는 이들이 그리스인이라는 말을 듣고 고향 소식을 알아보기 위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피게네이아는 자신의 동생인지도 모르는 채 오레스테스에게 트로이 전쟁과 고향 아르고스의 상황을 꼬치꼬치 캐묻는다. 그리고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아버지 아가멤논이 어머니(클리타임네스트라)와 정부 아이기토스에게 무참하게 살해된 것과 어머니가 동생 오레스테스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피게네이아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오레스테스에게 제안을 한다. 다른 한명만 제물로 바치고, 오레스테스는 살려줄 테니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가족에게 편지를 전해달라는 것이 제안 내용이었다.

그 말을 듣자, 오레스테스는 자기 대신 친구인 필라데스를 고향으로 보내 소식을 전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이피게네이아가 이들의 우정에 감동하며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이피게네이아 앞에 제물로 붙잡혀온 필라데스와 오레스트’ 벤자민 웨스트, 캔버스에 유채, 1003×1264㎝, 1766년, 테이트모던미술관(영국 런던)

이피게네이아는 필라데스에게 고향에 보낼 편지를 전해주며 가족에게 ‘꼭 그리고 잘’ 전해주겠다고 맹세하라고 말한다. 그러자 필라데스는 만약 자신이 편지를 잃어버려도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내용과 수신자를 말해달라고 요구한다.

그 편지의 내용은 이랬다. “어쩔 수 없이 타우리스라는 야만족의 나라에서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일을 하고 있는 누나를 데려가 달라고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에게 전해 달라.”

필라테스는 놀라며, 그 일은 당장이라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바로 옆에서 놀라 말을 잇지 못하는 오레스테스에게 그 편지를 건네준다. 오레스테스와 이피게네이아는 서로에게 쏟아내는 질문 끝에 남매임을 확인한다.

이피게네이아는 뜻밖에 만난 동생으로부터 그동안 가족에게 일어난 사건들과 아레이오스 파고스 언덕의 재판 결과, 그리고 그 재판 결과에 승복하지 못한 복수의 여신 때문에 오레스테스가 광기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이야기, 마지막으로 신탁 등을 자세히 듣는다. 그리고 이피게네이아는 신탁대로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그리스로 가져가 자신과 가문을 구해달라고 동생에게 부탁한다.

그녀는 저주받은 가문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던 가운데, 선의의 거짓말을 생각해 낸다. 이피게네이아는 토아스 왕에게 그리스인들이 혈육을 죽인 중죄인이라 제물로 바치기 전에 신성한 바닷물로 죄를 씻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르테미스 여신상도 그들이 만져 더러워졌기 때문에 바닷물로 씻기 위해 바닷가로 가져가야 하며, 씻는 장면을 아무도 보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이피게네이아 일행이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미리 준비한 배에 싣고 떠날 채비를 하는 동안, 이를 수상히 여긴 군인들의 신고로 달려온 토아스 왕에게 붙잡힐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아르테미스 여신과 고결한 누나의 도움으로 오레스테스는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가지고 무사히 그리스로 돌아온다. 그제 서야 오레스테스의 광기가 사라지고, 탄탈로스 가문에 얽힌 저주도 씻은 듯이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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