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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와 사진, 오리지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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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와 사진, 오리지널은?
  • 이순구
  • 승인 2017.07.23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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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구의 미술 산책] <16>게르하르트 리히터
이순구 화가 | 만화영상학 박사

삶은 움직인다. 때로는 움칠거리고 파동하며 한 쪽으로 기울다가 다시 평형을 되찾는다. 똑바로 걷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비틀거리는 취객의 갈지자 행보가 우리의 역사다. 사랑과 미움, 믿음과 불신, 희생과 욕심, 소통과 불통, 민주와 독재, 평화와 전쟁….

미술의 역사에서도 새로운 사조의 등장은 이전 시대에 대한 반목 현상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끊어질 수 없는 연결고리들이 알게 모르게 붙어있다.

<베티(Betty)>는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1932~ )의 1988년 유화작품이다. 10여 년 전의 딸 사진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겼다. 그리고 그 그림을 다시 사진으로 찍어 관람자에게 제시한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의 행위물중 어떤 것이 오리지널일까? 첫 번째 딸 사진, 두 번의 유화그림, 세 번째 유화그림의 사진?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이런 구분자체를 거부한다. 그가 태어난 곳은 동독일의 드레스덴이다. 사회주의의 보수적인 리얼리즘 미학만 교육받아온 그에게 1959년 카셀 도큐멘타에서 만난 잭슨 폴록의 작품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그는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 서독으로 이주한다. 이후 미국의 팝아트와 당시 독일 플럭서스의 반미학운동 등은 그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이때부터 다양한 포스트모던의 정신이 자리잡으며 정치나 예술의 이데올로기 조차 거부하게 된다. 예술에 있어서 하나의 양식은 전체주의가 강요하는 정치적 이념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이런 양식적인 스타일을 극도로 부정한 것이다.

그 일환으로 나타나는 ‘스타일 없는’ 작업이 오늘날까지 지속된다. 사진과 회화, 추상과 구상, 극사실적 묘사와 초현실주의적 상황과 소재들, 그리고 채색화와 단색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회화라는 매체를 재해석하고 혼동시키며 그 영역을 확대했다. 그는 1966년 작가노트에서 이러한 작품 성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어떤 목표도, 어떤 체계도, 어떤 경향도 추구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강령도, 어떤 양식도, 어떤 방향도 갖고 있지 않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일관성이 없고, 충성심도 없고, 수동적이다. 나는 무규정적인 것을, 무제약적인 것을 좋아한다. 나는 끝없는 불확실성을 좋아한다.”

불확실성의 추구는 기존의 관념적·주관적 의도에 속박되지 않는 회화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 것으로 해석된다. 즉 대상의 묘사보다는 회화의 실체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왼쪽이 유화작품이고 오른 쪽은 유화작품을 사진으로 찍어 인쇄한 것이다. ‘베티(Betty)’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캔버스에 유채, 102×72㎝, 1989년, Ⓒ세인트루이스미술관(Saint-Louis Art Museum, 미국). ‘베티(Betty)’ 게르하르트 리히터, 초경량 카드에 오프셋 인쇄(Editions CR: 75), 97.1×66.2㎝, 1991년, ⒸFoto Obricht Collection

1962년 이후 그는 사진이미지를 이용하기 시작한다. 인공적 사진 이미지의 회화화는 추상작품에까지 폭넓게 활용됐다. 그에게 있어 사진은 ‘양식도, 구성도, 규범도 없으며, 개인적 경험을 떨쳐버리게 해주는 순수한 이미지’로서 기존의 예술개념을 바꾸게 하는 중요한 개념이었던 것이다.

그의 작품 중 <베티(Betty)>는 옆모습이 약간 보이는 뒷모습으로 배경을 바라보고 있다. 사람의 뒷모습은 여러 가지 상상을 하게 만든다. 감상자에게 직접적인 표정보다 더 많은 것을 예상하게 하거나 추측하게 하며 심지어 감성을 이입하게 하는 빌미를 주기도 한다. 뒷모습은 자체의 그 어떤 부분에서 힌트를 주거나, 또는 보는 사람이 어떤 심성과 선험적 앎으로 작품을 대하느냐에 따라 감상의 폭이 달라질 수 있는 여지를 둔다.

허공을 향한 시선은 미래일수도 있고 표정을 감추고자 돌린 시선일수도 있다. 뒷모습 사진으로 유명한 사진작가 에두아르 부바(Edouard Boubat 1923~1999)의 작품에 대해 작가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는 이렇게 썼다.

“남자든 여자든 사람은 자신의 얼굴로 표정을 짓고 손짓을 하고 몸짓과 발걸음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모든 것이 다 정면에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그 이면은? 뒤쪽은? 등 뒤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 뒤쪽이 진실이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사진을 재생하는 회화 기법 또한 외곽을 흐리게 처리했을 뿐 아니라 얼굴 피부나 붉은 꽃무늬 스웨터의 처리, 머리칼 또한 공기의 작용인 듯 우리시야에 뿌옇게 들어온다. 그의 회화기법이나 추상기법 역시 이 방법을 쓰고 있다.

회화나 사진이 주는 선명성보다 흐릿한 익명성을 강조함으로써 감상자에게 과정을 이입하게 하는 전달자로서의 모호함을 제시한 것이다. 따라서 감상자는 포근하게 다가오는 1차적인 색채들을 확인하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를 다시 사진으로 찍어 회화와 사진 간의 공존적 형태를 제시하며 리히터 회화의 양식인 동시다발성과 분절성을 느끼게 해준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허상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이미지의 시대. 이런 상황에서 모든 것을 수용한 그의 예술성이야말로 현대의 절실한 대변자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그의 예술적 언어는 무궁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각양각색의 모티브(Various Motifs)’ 게르하르트 리히터, Atlas sheet: 445, 51.7×66.7㎝, 1978년, 렌바흐미술관(Lenbachhaus Museum, 독일 뮌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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