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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절대적 지지
  • 박한표
  • 승인 2017.07.21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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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표의 그리스로마신화 읽기] <19-3>클리타임네스트라의 남편 살해
박한표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 | 문학박사

10년간 계속된 트로이 전쟁은 결국 그리스의 승리로 끝났다. 오디세우스를 제외한 영웅들은 그리스로 귀환했다. 아가멤논도 집으로 돌아와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두 딸 중 살아남은 딸 엘렉트라의 환영을 받는다.

아들 오레스테스는 집에 없었다.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고 있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누나 엘렉트라가 동생 오레스테스를 포키스 땅으로 보내버렸기 때문이다.

미케네로 귀국할 당시 아가멤논은 아름다운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를 곁에 두고 있었다. 카산드라는 예언의 신 아폴론의 사랑을 독차지하기도 했다. 아폴론은 예언하는 능력을 가르쳐주는 대신 카산드라에게 사랑을 요구했다.

하지만 카산드라는 예언 능력을 배운 뒤에도 아폴론에게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다. 화가 난 아폴론은 단 한 번의 입맞춤으로 카산드라의 에언 능력에서 설득력을 빼앗아버렸다.

그녀는 트로이 목마가 조국의 멸망을 초래하리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트로이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고, 트로이는 목마 속에 숨어든 그리스 복병들에 의해 유린당했다. 조국이 멸망한 후, 그녀는 적의 장군 아가멤논의 전리품으로 미케네로 끌려온다.

그 곳에서 카산드라는 자신과 아가멤논 앞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고 사람들에게 예언하지만 먹혀들지 않았다. 두 사람은 결국 아가멤논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불륜관계를 맺고 있던 아이기스토스(작은 아버지의 아들)의 손에 처참하게 살해된다.

“아는 게 병,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처럼 그녀는 ‘쓸데없이’ 재앙을 미리 알게 되어 고통이 더 심했을 것이다. 설득력이 결여된 예언 능력은 카산드라를 더 불행하게 했음에 틀림없다.

‘잠든 아가멤논을 살해하기 전 주저하는 클리타임네스트라’ 피에르 나르시스 게랭, 캔버스에 유채, 325×342㎝, 1817년, 루브르박물관(프랑스 파리). 남편 살해를 주저하는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정부 아이기스토스가 부추기고 있다.

결국 아가멤논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온 날 밤 욕실에서 아내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에 의해 도끼로 참혹하게 살해된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남편 아가멤논이 없는 동안 남편의 작은 아버지 티에스테스의 아들 아이기스토스와 짜고 그를 살해할 계획을 치밀하게 세워두었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보면, 클리타임네스트라 역시 메데이아와 다름없는 악녀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입장에서 보면, 남편을 죽일 만한 정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아가멤논은 남편이기에 앞서 사랑하는 딸을 죽게 만든 살인자다. 게다가 아가멤논이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가한 폭력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는 아가멤논에 가슴 깊이 맺힌 또 하나의 원한이 있었다. 아가멤논은 그녀의 전 남편과 자식들을 무참하게 살해한 원수이기 때문이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아가멤논의 아내가 되기 전에 벌써 다른 사람의 아내로 갓난아기까지 둔 상태였다. 그런데 어느 파티에서 클리타임네스트라를 보고 첫 눈에 반한 아가멤논은 자신의 재산과 지위와 힘을 이용해 그녀의 전 남편과 갓난아기를 죽이고 그녀를 아내로 삼았던 것이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아무 잘못도 없이 아가멤논에 의해 두 번이나 자식을 잃은 쓰라린 아픔을 겪어야 했다.

살인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남편 살해는 본질적으로 아가멤논의 폭력성에 그 원인이 있다. 그러나 신화는 남편 때문에 자식을 두 번이나 잃은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악녀로 정의하는 데만 열을 올리고 있다. 이것은 또한 이아손의 잘못은 거론하지 않으면서 메데이아만 악녀로 단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 후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일어나는 일은 더 끔직하다. 아버지가 죽는 장면을 현장에서 목격한 엘렉트라는 몰래 동생을 찾아가 아버지의 죽음을 상기시키면서 동생에게 복수의 마음을 심어준다.

장성한 오레스테스는 델포이에 가서 아폴론의 뜻을 묻고 신의 뜻대로 어머니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정부 아이기토스를 죽인다. 그리고 그는 복수의 여신 에리니에스의 추적을 받는다.

‘오레스테스의 회한’ 윌리앙 아돌프 부그로, 캔버스에 유채, 278×227㎝, 1862년, 크라이슬러 컬렉션(Chrysler Collection).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복수의 여신 세 자매에게 쫓기고 있다. 복수의 여신 세 자매 중 하나가 오레스테스의 칼에 찔린 클리타임네스트라를 부둥켜안고 있다.

에리니에스 세 자매는 크로노스가 우라노스의 남근을 잘랐을 때 그 피가 대지에 떨어져 피어난 복수의 여신이다. 신의 뜻에 어긋나게 사는 인간, 맹세를 어긴 인간, 뼈를 주고 살을 준 부모를 해코지하는 인간이 나타날 때마다 올올이 뱀인 머리를 틀고 손에는 횃불을 든 채 우르르 나타난다. 이런 자들을 처단할 때면 기쁨에 못 이겨 통곡까지 하는 여신들이다. 세 자매로 이루어진 이 여신들이 가장 미워하는 죄인은 패륜아다.

에리니에스는 죄를 지은 인간의 마음에 죄의식을 심어주고 고통 받게 만든다. 친어머니를 죽인 것은 매우 중대한 죄이므로 오레스테스는 그 죄의식의 무게를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오레스테스는 자신에게 어머니를 죽이라고 신탁을 내린 아폴론 신전으로 피신하여 도움을 청한다. 아폴론은 복수의 여신들을 제지하며 오레스테스를 보호하다가, 그를 위해 당시 재판소로 이용되던 ‘아레이오스 파고스(Areios Pagos)’ 언덕에서 아테네 시민들의 재판을 주선한다.

12명의 아테네 시민들이 배심원이 되고, 아폴론이 변호사, 복수의 여신들로 이루어진 코로스의 장이 검사, 아테네 여신이 재판장이 되어 어머니를 살해한 오레스테스에 대한 재판이 벌어진다. 결과는 오레스테스가 유죄라는 쪽이 여섯, 무죄라는 쪽이 여섯이었다. 이렇게 해서 오레스테스는 무죄로 판결이 난다.

투표가 시작되고, 가부 동수가 되었을 때 재판장이 판결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아테나 여신은 투표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벌써 자신은 오레스테스를 위해 표를 던지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그러나 이 판결은 가부장제 사회의 폭력의 심각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가멤논은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전 남편과 자식을 죽이고, 또 그녀와 결혼하여 낳은 딸 이피게네이아마저도 죽음으로 내몬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 오레스테스는 어머니를 죽인 패륜아다.

그러나 신화는 이들의 행위는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단지 부당한 판결을 내려서 남편을 죽인 클리타임네스트라만 악녀로 낙인찍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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