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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진정한 의미의 소리란 무엇일까[유현주의 문학과 미술사이] 김훈의 ‘현의 노래’에서 존 케이지의 ‘소음의 미학’까지
유현주 미술평론가 | 미학박사

서기 562년 신라에 의해 멸망한 가야국의 악사 우륵에게 소설가 김훈이 묻는다. 악기는 홀로 아름다울 수 있는가? 금(琴)의12줄이 내는 소리에 시대의 아픔이 담길 때 비로소 악기는 진정 아름다운 것이 되는가?

소설 <현의 노래>는 단순히 음악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소설은 고대 한반도 철기문화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가야가 신라, 고구려, 백제와 영토 전쟁을 치르던 시절을 배경으로 한다. 이들 나라들의 끝없을 것만 같은 싸움, 믿기 힘들 정도로 잔인하지만 가야국의 종교적 신념 때문에 생긴 순장풍습과 영원불멸의 생에 대한 권력자들의 덧없는 갈망, 그 가운데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무기(철)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악기에 ‘가야 고을들’의 음을 담고자 하는 악사 우륵의 이야기, 자연과 분리되지 않았던 사람들의 삶이 신화처럼 소설에 그려져 있다.

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이 소설의 서사 전개는 크게 두 가지다.

그 하나는 쇠, 권력, 전쟁, 힘의 세계를 보여주는 ‘칼의 이야기’로,  가야를 현실적으로 지키는 역할을 맡은 대장장이 야로가 중심인물이다. 다른 하나는 악기, 음악, 제례의 춤과 소리를 다루는 ‘현의 이야기’이며 그 주인공은 궁정악사 우륵이다.

가야가 멸망하는 시점에 이 두 인물은 신라에 망명을 청한다. 그런데, 같은 국적, 같은 나이의 이 두 인물의 운명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신라는, 적군 아군을 가리지 않고 무기를 밀매하며 그들에게 협력해온 가야의 철의 장인 야로와 그의 아들 야적은 죽이지만, 금(琴) 연주와 춤으로 가야왕국의 소리를 지켜 온 우륵과 그의 제자 니문은 받아들이고 신라의 국원(國原; 지금의 충주)에 정착토록 해준다.

우륵은 이제 신라의 왕이 명한대로 신라의 악사들에게 소리를 전수하고 금(琴)마저 신라에게 넘긴다. 신라의 왕이 우륵에게 원한 것은 신라의 새 영토를 아우르는 새 나라의 소리를 담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륵은 가야의 무너진 고을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고유한 이미지를 소리에 담는다. 신라왕이 가야의 음악을 받아들인 것은 그들의 음악에 호감을 가져서가 아니라, 신라에 봉헌되는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너는 국원에 살면서 너의 소리를 과인의 나라의 소리로 키워라.” 진흥왕의 명령에 우륵은 답하지 않고 속으로 말한다. ‘소리는 스스로 스러지는 것이옵니다’라고. 어쩌면 우륵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음악은 정치에 예속될 수 없는 것임을. 그러기 위해서는 음악이 스스로 생성하고 사라지는, 즉 자신만의 운명을 결정하는 힘을 발휘하도록 해야 함을.

'현의 노래' 커버, 김훈 씀 | 문학동네 펴냄 | 323쪽 | 1만3000원

그러한가? 음악은 자신의 소리를 결정하고 만들고 나아가 소멸할 능력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그런데 음악은 아도르노가 말한 것처럼 ‘사회적인’ 것일까? 뜬금없는 이 질문들은 사실, 철학자 아도르노가 붙들었던 예술에 대한 화두이기도 하다.

2차 대전의 한 가운데에서 나치에 의해 추방당하고 아우슈비츠의 악몽에 시달렸던 이 유태인 철학자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는 말로 그 시대의 참상과 아픔을 토로했었다. 그런데 그 말 속에는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담겨있다.

말하자면, 예술이 사회적 문제들과 전혀 상관없이 존재할 수는 없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예술은 어떻게 그러한 문제들을 담아내야 한다는 것인가? 음악이 어떤 정치적 구호라도 외쳐야 한다는 것인가? 물론 예술이 선전이나 구호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렇다면 예술은 어떻게 시대의 아픔을, 혹은 정치적 저항을 ‘정치적이지’ 않게, 즉 가장 예술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음의 고저, 세기, 음의 색깔과 같은 음악적 요소들을 배열하는 행위는 겉으로 보았을 때 가장 비정치적인 음악적 행위일 것이다. 그 예로 20세기 초 음악사의 새로운 양식 혹은 음악의 모더니즘으로 불리던 음렬주의를 들 수 있다.

전통음악의 조성법이나 스토리텔링적 기법, 감각적이고 오락적인 기능에 대해 반기를 든 이 음렬주의 음악은 사실 음악 자체의 언어만으로 가장 음악적인 것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마치 20세기 초 그림에서 사물을 재현하지 않고 오로지 색과 선으로 충분히 마음속의 어떤 것을 혹은 세상의 어떤 모습을 담고자 했던 추상화처럼 말이다.

흥미롭게도, 이처럼 정치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가장 음악적인 것을 추구한 음렬주의 음악을 나치는 무척 싫어하였는데, 음렬주의 작곡가들 중에는 유태인 출신이 유독 많았다. 그중 쇤베르크, 베베른, 알반 베르크는 공연이 금지되었으며, 쇤베르크는 급기야 미국으로 이민을 가야 했다.

이처럼 파시즘이 팽배하던 시절 정치와는 거리를 둠으로써 오히려 더 정치의 탄압을 받던 음렬주의 음악(‘무조음악’이라고도 불림), 불협화음 등 새로운 음악은 궁극적으로는 조성에 길들여진 음악적 전통을 넘어서는 혁명적 시도를 꿈꾸었다고 하겠다. 때문에 이들 음악은 조성에 익숙한 우리 귀에 낯설고 때로 불쾌하게 들려 대중들에게 외면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어쩌면 이러한 비(非)미적인 예술이야말로 아름답지 않은 시대의 진실을 담는 고통의 소리, 고통의 예술언어는 아닐까? <현의 노래> 첫머리에 “악기가 홀로 아름다울 수 없고 악기는 그 시대의 고난과 더불어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을 뿐”이라는 고백은 이처럼 20세기 음렬주의와 기묘하게 조우한다.

<흰색회화>와 존 케이지의 <4분 33초>

1972년 보스턴 하버드 광장에서 존 케이지의 음악이 연주된다. 그런데 그랜드 피아노에 시계를 올려놓고 잠시 후 연주자가 피아노 뚜껑을 닫는다. 3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그 음악은 33초, 2분40초, 1분20초, 악보엔 ‘침묵’이라고 적혀있을 뿐이다.

연주는 피아노 소리 대신 객석 여기저기 쏟아지는 웅성거림과 숨소리로 채워진다. 즉 소음이 연주되었던 것이다. 1952년 독일에서 초연되었던 이 음악은 존 케이지의 <4분 33초>이다. 그러나 소음을 음악의 범주로 끌어들인 자들은 그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탈리아의 미래주의 작가들이 선구적으로 이미 소음음악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1909년 필립포 토마소 마리네티는 “굉음을 울리는 자동차가 승리의 여신보다 더 아름답다”는 기이한 표현을 써가며, ‘미래주의 선언문’에 낡은 전통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예술, 새로운 국가 이태리를 건설하자고 선동한다. 미래주의 예술가들은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미래를 재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고, 문학, 미술, 음악, 건축, 무용, 영화를 비롯해 음식, 의복, 전쟁 등에 관해서도 첨단의 미래를 예언하고자 했다.

한편, 미래주의의 일원이었던 루이지 루솔로는 미래주의 음악을 선언했는데, 그는 인간의 청각으로 감지할 수 있는 모든 소리가 진정한 음이라고 보았다. 즉 기존의 악기만으로는 현대인들의 욕구에 부합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은 20세기 전위 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는 것이었으니, 음악에 소음과 같은 우연적 요소를 개입시키려 한 케이지의 <4분 33초>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나온 음악이다.

'흰색 회화(White Painting) - 세개의 패널',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캔버스에 라텍스 페인트, 1951년,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MOMA) © 로버트 라우센버그 재단(Robert Rauschenberg Foundation)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자신의 친구 화가인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그림 <흰색회화>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라우센버그의 그림에 우연적인 요소가 다분히 매력이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텅 빈 캔버스를 전시했기 때문인데, 작품에 쏘인 조명상태나 그림을 보려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캔버스에 비추는 것이 곧 그대로 작품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주변의 소리가 곧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생각, 우연한 것이 예술이 된다는 생각은 곧 케이지의 <4분 33초>를 탄생시킨다. 그의 음악은 당시 주류 음악계에서 환영받지 못했지만, 모든 것이 음이 될 수 있다는 놀라운 사고의 전환은 현대음악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훗날 케이지의 <장치된 피아노(prepared piano)>연주곡들은 고무지우개, 볼트, 연필 등을 피아노 현이나 해머에 끼워 연주하도록 함으로써 그러한 우연성을 아예 작곡법으로 이끌어 낸다. 소음과 우연성에서 발전된 이 음악들은 오늘날 현대미술에서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사운드아트’의 선구적 역할을 한 셈이다.

소리는 왕의 소유만도 아니고 한 나라의 것만도 아니라는 우륵의 음성이 여기서 새롭게 울린다. 음의 주인은 음 그 자체, 혹은 소음을 포함한 모든 소리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음렬주의도 소음의 음악도 모두 음 자체의 자율성을 찾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우륵이 찾았던 12줄의 진음(眞音)이 무엇인지 필자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우륵이 찾던 것이 어쩌면 아도르노가 말한 고통의 진실을 담는 언어일 것이라고 상상만 해본다. 현대는 음 자체가 갖는 자율성을 추구하여 이제 소리가 악기에 가두어지지 않고 ‘소음’의 음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이 시대의 음은 누가 만드는가?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들으며 전 세계가 흥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21세기, 우리시대 진정한 의미의 소리란 무엇일까?

* 존 케이지(John Cage)의 '장치된 피아노를 위한 바카날레(Bacchanale for Prepared Piano)'(1940년) 유튜브 영상 보기 ☞ https://www.youtube.com/watch?v=E8fRMKv7r54

유현주  adorno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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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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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산 2017-07-21 17:59:11

    노벨상을 받을 만한 혁명적인 이론으로 우주를 새롭게 설명하면서 기존의 과학 이론들을 부정하는 책(제목; 과학의 재발견)이 나왔는데 과학자들이 침묵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침묵하지 말고 당당하게 반대나 찬성을 표시하고 기자들도 실상을 보도하라! 이 책은 중력과 전자기력을 하나로 융합한 새로운 이론으로 우주의 모든 현상을 명쾌하게 설명하면서 서양과학으로 동양철학(이기일원론과 연기론)을 증명하고 동양철학으로 서양과학을 완성한 통일장이론서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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