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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면 추상, 절제된 혹은 풀어진[이순구의 미술산책] <15>카지미르 말레비치와 마크 로스코의 사각형
이순구 화가 | 만화영상학 박사

오늘을 산다는 것은 미래의 과거를 책임지는 일이다. 그래서 한발 한발은 매우 소중한 디딤이다. 신중함과 순간의 예단(豫斷)이 필요하다. 점점 어두운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안개를 헤집듯 나가야하는 이 시대의 소명도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몫이다.

절체절명의 극한상황이 오면 예술의 힘은 새로운 씨앗에서 새 생명을 싹틔운다. 이 싹틔움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이며 인간세계에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다.

오늘은 두 화가의 작품 앞에 섰다.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1878~1935)의 <하얀색 위의 검은 사각형>(1915)과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의 <밝은 붉은색, 넘치는 검정>(1957)이다. 이들의 색면(色面)은 절대성과 자율성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재미난 비교가 된다.

말레비치는 우크라이나 키예프 미술학교와 모스크바 미술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다. 초기에는 인상파나 야수파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으나 차츰 상징주의를 포함한 입체주의와 러시아 민속미술 등에 관심을 두었다.

그는 1913년 아방가르드 오페라 <태양에 대한 승리>의 무대장치와 의상을 맡아 미래주의를 연상시키는 기하학적 형태의 화려한 설치디자인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경험이 회화작품에도 반영돼 그림의 구조가 더욱 대담한 단순성을 띠었다.

이때부터 불필요한 세부묘사 없이 캔버스를 깔끔하게 사각형, 원, 직사각형의 기본적인 형태로만 구성했고 색채도 단색조로 제한했다. 이 시기부터 구상적인 재현은 사라지고 순수추상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1915년 ‘러시아의 마지막 입체 미래주의 전시’에 발표한 <검은 사각형>은 전시실의 동편에 이콘화(icon)처럼 걸어 마치 러시아 정교회 가정에 걸린 종교적인 성상을 연상시켰다. 단순한 하얀색 바탕에 검은 사각형 하나가 있을 뿐인 이 작품은 절대주의(Suprematisme)의 탄생을 알렸다.

말레비치는 ‘사각형’에 대한 실마리를 “나는 나 자신을 무(無)의 형태로 변형시켜 아카데미 미술의 시궁창에서 건져냈다. 정사각형은 잠재의식적 형태가 아니다. 그것은 직관적인 논리의 창조물이며 새로운 미술의 얼굴이다. 그것은 미술에서 순수한 창조의 첫 단계”라고 말한다. 그 이후 ‘무(無)’에 대한 인식을 더욱 발전시켜 색을 완전히 빼어버린 <흰색 위의 흰 정사각형>(1919)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말레비치 절대주의의 논리적‧철학적 종결점이 됐다.

‘하얀 색 위의 검은 사각형(Black Suprematic Square)’ 카지미르 말레비치, 캔버스에 유채, 79.5×79.5㎝, 1915년, 트레티야코프미술관(러시아 모스크바)

당시 그들의 절대주의 선언을 보면 예술에 대한 재미있는 주장이 있다. “절대주의에 의해, 나는 예술에 있어서 순수한 감상이 절대라는 것을 주장한다.” 그것은 추상이라 해도 단순히 현실적 감각세계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감성의 극대화로서의 추상이라는 것이다. 순수감성의 주관주의적 추상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회화의 절대적 감성으로 나아간 말래비치의 작품을 보면 또 다른 작가 마크 로스코가 떠오른다.

그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미국 오리건 주에서 성장했다. 20대 초 스승 밀턴 에버리(Milton Avery) 밑에서 그림공부를 시작했으나 거의 독학수준이었다고 한다. 이 무렵은 절제된 형상, 미묘한 색감에 매료된 시기였다. 드라마와 신화, 심리분석 등에 관심이 컸으며, 렘브란트의 그림이나 모차르트의 음악, 니체의 철학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마크 로스코는 초기 사실주의양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도시인들의 고독이나 종교의식이 주제였다. 1940년대에 이르러 추상화경향을 띠었으며 점차 추상표현주의의 양식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추상표현주의 화가들과는 다르게 격렬한 붓놀림이나 물감을 뚝뚝 떨어뜨리고 뿌리는 액션적인 표현기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즉 그림을 그린 동작이 나타나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화면은 서로 스며드는 듯 커다란 색의 면들이 나란히 병치돼 있으며, 그것은 몽롱한 공간 속에 그림의 평면과 나란히 떠 있는 듯이 보이는 특징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더 구체화된 색의 면들은 부드러운 윤곽을 가진 두세 개의 직사각형만으로 구성을 제한했다. 이 직사각형들은 추상화된 기념비적 성상처럼 벽 크기의 수직 화폭을 가득 채웠다. 이때부터 이를 기본 양식으로 세련된 색채의 대조를 평생을 통해 다듬게 된다.

그의 색면들은 놀랍게도 거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인 색채사이의 미묘한 차이로 인해 감상자들에게 놀랄 만한 친밀감을 주는 위대한 면이 된다. 바로 이점이 그의 작품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밝은 붉은색 넘치는 검은색(Light Red Over Black)’ 마크 로스코, 캔버스에 유채, 152.7×230.6㎝, 1957년, 테이트모던미술관(영국 런던)

말레비치나 마크 로스코는 같은 색면들을 작품의 궁극적인 귀결로 삼았다. 하나는 절제된 사각이었고 하나는 풀어진 사각이었다. 회화(繪)의 극점으로 간 두 사람의 결론은 같은 지점에서 만날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사색 결과는 명확히 구분된다.

말레비치의 선언처럼 “순수감상”의 결과로서 절체절명의 극한점인 ‘검은 사각형’과 마크 로스코의 풀어진 사각형은 절대성과 자율성으로 대비된다. 말레비치의 절대성은 더도 덜도 아닌 그만큼의 시대와 사회를 반영한 것이다. 반면 시기적으로 조금 늦게 나타난 마크 로스크의 색면은 현대의 감각에 뒤지지 않는 자율성과 응용성을 보여준다.

테이트 모던(Tate Modern Museum)에서 만났던 그의 거대한 작품에서 사람들에게 저 마다의 감성을 심어주는 아름다운 색채를 경험했다. 경계가 있는 듯 없는 듯 넘어서고, 그 넘어선 영역도 제 고집을 피우지 않는다. 감상자마다 제각기 그의 작품 앞에서 때로는 평화를, 안식을, 충일함을, 화려함을, 절제를, 아름다움을, 상생의 기쁨을 얻는다고 한다.

조화는 거대한 힘을 가졌다. 조화는 잘 어울린다는 뜻이다. 썩은 것의 결합은 조화라 할 수 없다. 야합(野合)이다. 야합은 예술이 될 수 없다. 조잡한 악취만 풍길 뿐이다.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의 극대화된 간결함, 마크 로스코의 절제된 자율은 제각각 상대를 찾아 조화를 이룬다. 마크 로스코의 어우러지는 색면 추상,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은 각각 사각형 외부의 흰 화면이 자신의 파트너다. 이 만남은 오롯이 어우러지는 화합이며 그것은 아름다운 상생의 조합이다.

이순구  webmaster@www.sj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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