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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 느림의 미학[유현주의 문학과 미술사이] 밀란 쿤데라의 ‘느림’과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

사랑의 속도를 측정할 수 있을까? 밀란 쿤데라의 소설 <느림>은 속도의 엑스터시에 취한 현대인의 사랑과 삶에 일침을 가하는 이야기다.


소설의 장소는 쿤데라가 자신의 아내와 함께 묵은 파리의 옛 성이다. 거기서 쿤데라는 18세기 작가 비방 드농의 소설 <내일은 없다>에 나오는 젊은 기사와 T부인이 나눈 사랑이야기를 가져와 20세기 한 평범한 곤충학자의 ‘인스턴트식’ 사랑을 대결시킨다. 200년의 시차를 두고 두 사랑이야기를 대비시키는 이유는 두 스토리가 한편으로는 유사한 구조를 갖지만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빠르거나 느리거나, 춤꾼이거나 연인이거나

 

 

두 이야기는 하룻밤의 사랑이란 점에서 즉각적이고 일회적이다. 하지만 18세기의 사랑은 낭만적인 절차와 느림의 시간을 즐긴다면, 20세기의 사랑은 오로지 자신의 욕망만 채우기 급급하고 가볍다는 것이 쿤데라의 분석이다. 소설은 쿤데라 특유의 농담과 위트를 개성 넘치는 문체로 사용하면서 과거의 낭만적인 사랑과 현대인의 깃털처럼 가벼운 사랑을 독자로 하여금 확인하게 한다. 

 

비방 드농의 소설은 T부인이 자신의 정부인 후작과 짜고 젊은 기사를 유혹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T부인은 후작의 존재를 은폐할 목적으로 남편 앞에 가짜 정부행세를 하게 된 젊은 기사를 데리고 온다. 젊은 기사와의 하룻밤을 자신의 저택 밀실에서 보내기 위한 T부인의 계획은 치밀한데, 쿤데라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낭만적이고 심지어 예술적이기까지 하다.


결국 이 젊은 기사는 아무것도 모른 채 T부인과 사랑을 천천히 나누며 그 밤을 황홀하게 보낸다. 아침이 되어 모든 걸 눈치 챈 기사는 처음엔 모욕감을 느꼈으나, 후작이 마련해준 마차를 타고 떠나면서 T부인과 나눈 로맨틱한 하룻밤의 사랑을 소중히 간직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18세기 그 젊은 기사와 같은 성에서 묵은 20세기 프랑스 곤충학자 뱅상은 어떤 사랑을 나누었을까? 뱅상이 곤충학회에서 만난 타자수(기록을 위해 타이프를 치는 사람)인 쥘리와 하룻밤 사랑을 나누는 과정은 그야말로 희극적이다.

 

 

뱅상이란 인물 자체가 대중적인 현대인의 표상, 즉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인 ‘춤꾼’이다. 소설에서 뱅상은 타인을 주목시키는 뛰어난 언변과 재능을 타고난 역사학자 퐁트벵을 흠모하는 인물인데, 쿤데라는 이 두 사람을 ‘춤꾼’으로 묘사한다. 퐁트벵의 입을 통해 쿤데라는 ‘춤꾼’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대중들 앞에서 “도덕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을 춤”추는 자, “마치 조각가가 자신이 조각중인 조각상을 사랑하듯 제 삶을 사랑하는” 자, 세상을 바꾸는데 관심은 없고 “자신을 즐겁게 해준다는 이유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렌즈 있는 카메라 앞(대중)에서나 렌즈 없는 카메라(오늘날 인터넷) 앞에서조차도 오로지 대중의 눈을 의식하는 세속적인 정치인들이다.


진심은 없으나 에이즈 환자들을 돕는 척하며 그들에게 입맞춤하는 정치인들, 즉 자신의 인기를 위해 혹은 명예를 위해,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을 돕는 연대활동에 참가하는 인물들은 모두 노출광이요 ‘춤꾼’인 것이다. 때문에 학회장에서 망신을 당한 뱅상은 쥘리와 수영장에서 사랑을 나누는(뱅상 입장에서는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동안에도, 그리고 그 욕망을 채우지 못한 채로 자신의 숙소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그러한 자신의 해프닝에 대해 오로지 그의 동료들(사실상 익명의 대중들)과 주고받을 대화 내용만 생각한다.


진정한 자기반성을 이루는 주체성도, 타인에 대한 인정(쥘리에 대한 존중)은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단 하룻밤일지언정 진정한 사랑, 진실한 공감, 느림의 시간을 보여주는 18세기 식 사랑을 쿤데라가 찬미하는 것을 이해 못할 이유는 없다. 그의 말대로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 할 수 있기에, 우리는 뱅상이 강간하듯 취하는 인스턴트식 사랑 따위에 공감하기보다는, 비록 동기야 어찌되었든 만남 그 자체의 시간에 충실한 18세기 느림의 사랑에 한 표를 던질 수 있는 것이다.    


연인의 조건, 느림의 기술
 

 

20세기 초현실주의 예술가로 알려져 있는 벨기에 작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연인>은 마치 뱅상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행할 수 있는 위험한 사랑의 모습이다.


하얀 보자기를 쓴 두 연인은 키스하고 있으되 어떠한 감각도 느낄 수 없는 채로 마주한 모습이다. 마치 장님처럼 서로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서로를 향해 밀착해 있는 모습은 연인이면서도 서로 진짜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 즉 ‘불가능한 소통’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마그리트는 어린 시절, 강가에서 익사체로 발견된 어머니가 흰색 보자기에 가려져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연인>에서 그들이 쓴 보자기는 어머니의 죽음에서 느껴지는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선에 놓인 어떤 것, 즉 어쩌면 인간에게 영원히 사랑은 불가능한, 즉 진정한 모습을 알 수 없는 채로 만나는 실존적 상황을 표현한 것처럼 생각된다.


마그리트의 그림을 독해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초현실주의 미술기법을 사용하는 그의 표현방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마그리트는 대상을 똑같이 그려내는 것 같지만 언제나 거기엔 꿈, 무의식의 이미지, 혹은 이미지와 실재 사이의 불일치에 대한 긴장을 담고 있다. 이러한 긴장을 이끌어내는 방식은 주로 ‘데페이즈망(dpaysement)’이다. 즉 ‘사물을 본래의 용도, 기능, 의미에서 이탈시켜 전혀 낯선 장소에 조합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전치법’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연인>은 우리에게 두 남녀의 키스신을 재현한 것처럼 보이지만, 얼굴을 가린 천(용도에서 벗어난)에 의해 ‘볼 수 없음’ ‘익명적인’ ‘주체가 없는’ ‘소통할 수 없음’의 역설을 만들어낸다. 설혹 마그리트의 그림이 뱅상의 인스턴트 같은 사랑이 아니라, T부인과 젊은 기사의 맹목적인 로맨틱한 사랑이라 하더라도, 사랑 그 자체에 몰두한 연인에겐 근본적으로 저러한 소통의 부재가 있을 수 있음을 말해준다.


쿤데라의 <느림>에서도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은 ‘느림’의 속도에서만 오래 유지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천천히 나눈 그 사랑을 평생 간직할 지도 모를 ‘느림’의 템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 느린 속도로 사랑을 주고받은 황홀한 기억만이 우연히 만나 이루어진 모든 ‘연인’들의 조건일지도 모르겠다.

유현주  webmaster@sj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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