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댓글
변상섭, 그림속을 거닐다
세종시교육청 공동캠페인
아름다움과 추함, 예술의 관점이란?
상태바
아름다움과 추함, 예술의 관점이란?
  • 이순구
  • 승인 2017.04.28 09: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순구의 미술산책] <11>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프로이트의 ‘베네피츠 슈퍼바이저 슬리핑’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던가. 눈은 대상을 지각해 그 정보를 두뇌에 전달한다. 우리는 이 정보를 통해 대상을 판단하고 느낀다. 판단은 다시 이성적이거나 감성적인 울림이 되어 행동이나 생각으로 연결된다.


관점은 ‘사물을 관찰하거나 고찰할 때, 그것을 바라보는 방향이나 생각하는 입장’이다. 공동체적인 관점은 도덕적이어야 하고, 합리적이어야 하며, 순리와 이치에 부합해야한다.


그러나 예술적 관점은 다르다. 도덕성이나 합리성에서 꾸준히 벗어나고자 한다. 이는 창작이 갖는 도전이며 새로움일 것이다. 창작의 관점이 전혀 다른 두 인물화를 살펴보자.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년경~1576)의 〈우르비노의 비너스(Venus of Urbino)>는 이상화된 여체를 묘사하고 있다. 궁전의 커다란 방에 놓인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비너스는 빼어난 형태미를 보여준다.

 

 

 

그는 관능적인 이 느낌의 주제를 절제 있게 여러 번 반복해서 그렸다. 시대적으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성기, 베네치아 회화의 황금기였다.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은 경제적·문화적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이상적인 여체에는 사회적인 이상이 반영됐다.


티치아노는 인물의 특성을 정확히 파악해 초상화를 그렸다. 신화를 주제로 그린 그림에서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이교적인 쾌활함과 자유분방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비너스의 육체는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관능적이다. 후세의 루벤스나 니콜라 푸생 같은 대가들도 즐겨 모방했을 정도라고 한다.


루시안 프로이트(Lucian Michael Freud, 1922~2011)는 20세기 작가다. 20세기는 미술의 양상이 복합적으로 나타난 시대다. 그의 1995년 작 <베네피츠 슈퍼바이저 슬리핑(Benefits Supervisor Sleeping)> 속 여성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인 루시안 프로이트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미화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초상과 인체를 주로 그렸다. 이 작품이 만약 중세에 그려졌다면 아마도 온갖 질타와 모멸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추함에 대한 표현이 가장 인간적인 것일 수도 있다. 화가는 인체에 대한 관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얼굴에 드러난 감정을 담고자 노력한다. 사람들의 몸을 통해 내 감정을 표현하고 싶기 때문이다.”


감정은 관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축 늘어진 살과 인체와 비슷한 중량감의 소파에 천박스럽게, 혹은 아무렇게나 누워있는 자세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딘지 소파와 인물이 딱 맞아 떨어진다는 느낌은 어쩔 수가 없다.


그렇다면 가장 이상적인 인체와 극단적으로 허물어진 인체 사이에는 어떤 관점들이 작용한 것일까?


첫째는 시대에 따른 개념의 차이일 것이다. 결국 시대의 예술사조는 관점에서 바뀌고 변화된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 느끼는 예술성이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것을 흔히 발전이라고 말 하지만 예술의 가치관과 기능은 발전만으로 표현하기에는 그 상황이 미묘하고 복잡하다. 따라서 예술은 발전이라 말할 수 없으며 관점의 변화로 얘기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이 두 작품을 놓고 아름다운 것을 선택하라면 대개 티치아노의〈우르비노의 비너스>를 선택할 것이다. 한눈에 보아도 이상적인 인체, 안정된 색채, 도도한 멋을 가지고 있어서다. 그렇다고 루시안 프로이트의 <베네피츠 슈퍼바이저 슬리핑>을 선택했다고 잘못된 것은 아니다. 직설적이고 사실적인 화법, 화가가 추구하고자하는 진실성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루시안 프로이트의 작품은 지난 2008년 뉴욕 크리스티에서 3360만 달러(약 353억 원)에 낙찰됐다. 이 정도면 시대의 관점이 어떤 것인지 짐작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예술적 가치가 적어도 미(美)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예술은 사람과 사람사이에 존재한다. 예술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술은 인류사의 촉수이기 때문이다. 삶속에서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든, 추함이든 그것의 가치는 각자가 판단할 일이다. 먼저 작품의 깊은 속내를 들여다보는 예술적인 감각을 일깨워 봄이 어떨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