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 옹호한 ‘순결한 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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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 옹호한 ‘순결한 처녀’
  • 박한표
  • 승인 2017.04.19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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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표의 그리스·로마신화 읽기] <16-3>전쟁의 신 아테나

올림포스 신들 중에는 전쟁을 주관하는 두 신이 있다. 아레스와 아테나다. 그러나 두 신이 주관하는 전쟁의 의미는 다르다. 아레스는 맹목적이고 파괴적인, 즉 공격적인 전쟁을 주관한다. 반면 아테나는 지혜와 기술의 산물인 문명과 도시를 수호하는 방어적인 전쟁을 주관한다. 그래서 아레스의 주요 무기는 공격적인 창이고, 아테나의 주요 무기는 방어적인 방패다.


아테나는 아레스처럼 피비린내 나고 난폭한 전투를 즐기지 않는다. 아테나는 ‘전쟁으로 인한 정의’를 상징한다. 아테나가 보여주는 것은 싸움에서 가장 필요한 용기와 힘이 아니라, 지혜와 정의의 편에 서서 이를 지키는 것이다. 아테나는 우아하고 현명한 여신으로서 인류 문명의 수호신이며, 평화를 지키는 전쟁의 신이고, 자비로운 심판관이다.


아테나는 의롭고 용맹스러운 영웅들의 후견인이며, 전쟁의 승리를 상징하는 승리의 여신 니케(Nike)를 늘 동반한다. 영웅들이 위기에 처하면 아테나가 어김없이 나타나 구원의 손을 내밀어준다.

 

 

아테나의 도움으로 영웅 페르세우스는 보는 사람을 즉시 돌로 만들어버리는 괴물 메두사의 머리를 자른다. 그 보답으로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의 머리를 아테나의 방패에 박아준다. 아테나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모든 공격자를 즉시 돌로 만들어버리는 메두사의 머리가 박힌 방패다. 이는 방어적인 전쟁을 주관하는 여신의 성격을 대변하기도 한다.


아테나는 페르세우스 외에도 벨레로폰, 헤라클레스, 아킬레우스, 오디세우스 등과 같은 영웅들의 든든한 후견인 노릇을 한다. 영웅들이 모험과 전쟁에서 이름을 떨친 것은 아테나 여신의 도움에 힘입은 결과다.


아테나의 별명 중 하나가 ‘팔라스’다. 팔라스는 어린 시절 아테나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런데 아테나가 사소한 다툼 끝에 실수로 그녀를 죽이고 말았다. 아테나는 자신의 과오로 죽은 팔라스의 모습을 조각해 제우스의 방패인 아이기스(Aigis)의 한복판에 매달았다. ‘누군가의 보호 또는 지배를 받는다’는 뜻의 ‘아이기스 아래에 있다(To be under the Aigis)’는 표현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언젠가 제우스가 이 조각상을 땅으로 던졌다. 이 조각상이 바로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도시를 지켜준다는 팔라디온(Palladion)이다. 트로이 전쟁에서 이 조각상이 트로이 성을 오랫동안 지켰다는 설이 있었다. 트로이는 오디세우스에게 팔라디온을 도난당한 후 패망했다.


아테나는 처녀신이다. 비록 모권에 맞서 부권의 우위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여신인 아테나의 현실적인 판단일 뿐이다. 아테나는 처녀로서 순결을 끝까지 고집함으로써 자신이 결코 남성에게 종속적인 존재가 아님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아테나가 처녀의 신분을 고수하려는 것은 다름 아닌 철저한 독립성 때문이다.

 

 

순결한 처녀를 고집하는 아테나의 정절 의식을 읽을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헤파이스토스는 무기 제작을 부탁하기 위해 대장간을 찾아온 아테나에게 반하여 그녀를 범하려고 덮친다. 헤파이스토스는 아내 아프로디테가 상대해 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아테나가 너무 완강히 거부하는 바람에 열이 오를 대로 오른 헤파이스토스는 그녀의 허벅지에 정액을 흘리고 말았다. 화가 난 아테나가 그 정액을 양털로 닦아 땅에 버리자 흙에서 아이가 태어났다.


이 아이가 바로 훗날 ‘양털과 대지’라는 뜻의 에리크토니오스(Erichthonios)다. 그는 아테나이의 왕이 된다. 정의감이 강한 아테나는 아버지야 어떻든 간에 이 아이의 어머니임을 인정하고 스스로 양육을 맡았다.


머리가 좋으면, 가슴이 차가운가 보다. 이성의 아폴론과 같이 지혜의 아테나도 차가운 신이다. 게다가 처녀다. 아테나는 남성을 사랑한 적도 없고 육체관계도 관심이 없다. 철저한 독신주의자다. 그러나 아테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부권 신화의 수호신이다.


아테나가 여성을 비하하고 남성의 손을 들어준 대표적인 일화가 어머니를 살해한 오레스테스에게 무죄를 선고한 사실을 꼽을 수 있다.


어머니를 살해한 오레스테스의 죄를 묻는 재판이 아레이오스 파고스에서 벌어진다. 복수의 여신들이 검사를 맡고, 아폴론이 변호인을 맡아서 팽팽한 설전이 전개된다. 아테네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의 투표 결과는 유죄와 무죄 동수였다. 그런데 재판장 아테나가 캐스팅보트를 행사하여 무죄를 선고한다.


이렇듯 아테나는 남성의 권위를 적극 인정한다. 그렇지만 남성에게 종속되기는 싫어한다. 철저히 독립적이다. 그것은 아테나가 현실주의자이기 때문이다. 부권을 인정하는 것은 남성의 힘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제도권 속으로 편입되어 그들과 대등하게 경쟁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아테나는 여권을 위해 싸우기에는 재능과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에고이스트다. 그래서 아테나를 ‘남성적 여성’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몸은 여성이지만, 마음은 남성이란 얘기다. 아테나는 남성 본위의 사회에서 지극히 현실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독신으로 전문직 여성의 모델이다. 아테나는 ‘똑똑하고 차가운 커리어 우먼’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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