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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한 여성의 자결과 로마 공화정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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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한 여성의 자결과 로마 공화정의 탄생
  • 이환태
  • 승인 2017.04.2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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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태의 인문학여행] <9>셰익스피어의 ‘루크리스의 능욕’

아무리 포악한 인간이라도 양심의 가책은 피할 수 없다. 양심이 있는 한 인간은 어떤 죄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심은 인간의 자기검증 시스템과 같다. 부와 권력에 대한 욕심에 눈멀어 양심에 대해 눈을 질끈 감았다가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경우를 예나 지금이나 심심치 않게 본다.


고대 로마에서 있었던 일이다. 노예의 아들로서 선왕의 두 왕자를 제치고 로마의 6대 왕이 된 서비우스 털리우스(Servius Tullius)는 그의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두 딸은 한 아버지의 자식이라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판이하게 달랐다.


하나는 너무 착한 반면, 다른 하나는 너무도 사악했다. 그는 자신에게 왕위를 물려준 선왕의 두 아들에게 이 둘을 결혼시키는데, 공교롭게도 그들 역시 하나는 너무 착한 반면, 하나는 너무 사악했다. 두 딸의 운명을 보정(補正)해 보려는 마음에서, 그는 착한 딸은 사악한 왕자에게, 사악한 딸은 착한 왕자에게 결혼을 시켰다. 그러나 사악한 사람들은 착한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끼리 다시 결혼했다.


타르퀴니우스(Tarquinius)라는 이름의 그 사악한 왕자는 하루라도 빨리 왕이 되고 싶어서 자기 대신 왕이 된 털리우스 왕을 죽이기로 한다. 그는 부하들을 데리고 왕에게 찾아가서 자신이 왕임을 선언하지만 왕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그를 옥좌에서 끌어낸 다음 계단 아래 길바닥에 내동댕이친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노왕이 천천히 일어나자, 타르퀴니우스는 수하들을 시켜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


친정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던 그의 사악한 부인 털리아(Tullia)는 집에서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 마차를 타고 의사당으로 달려가는데, 의사당 근처의 좁은 길에 이르렀을 때 마부가 갑자기 마차를 세웠다. 남편이 죽인 친정아버지의 시신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권력에 눈먼 털리아는 마부에게 그대로 마차를 몰 것을 명령한다. 오로지 왕비가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나머지 사람들이 지켜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왕이 된 남편에게 축하인사를 했다.

 

 

이처럼 사악한 사람들이 행복할 리는 없다. 만족은 순간에 불과하고 여생은 후회와 가책만 있을 뿐이다. 악마나 다름없던 타르퀴니우스도 말년엔 심한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했다. 그는 매일 밤 악몽을 꾸었다. 그는 예전에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몹시 후회했다. 욕망에 사로잡혀 있을 땐 욕망의 대상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아 몰랐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니 그렇게 쟁취한 것은 엄청난 대가를 요구했다. 사람들은 그가 빨리 죽거나 누군가가 그를 몰아내 주기만을 바랐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타르퀴니우스 왕은 어느 날 이웃 나라와의 전쟁을 위해 아들들을 데리고 출정한다. 이들과 휘하 장수들 사이에서 누구의 아내가 가장 정숙한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고, 그들은 급기야 밤중에 말을 달려 로마로 돌아가서 아내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를 확인한다. 다른 부인들은 흥청망청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콜라티누스(Collatinus)라는 장수의 아내 루크레티아(Lucretia)만은 하인들과 함께 늦은 밤까지 옷감을 짜며 정숙하게 가정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자태는 비할 데 없이 아름다웠다.


왕자 중 하나인 섹스터스(Sextus) 타르퀴니우스는 정숙한데다가 아름답기까지 한 루크레티아를 본 순간 욕정을 주체하지 못하였고, 밤중에 몰래 진중을 빠져나와 그녀의 집을 찾는다. 남편의 친구이자 왕자의 신분인 그를 루크레티아는 정중히 맞이하지만, 섹스터스 타르퀴니우스는 그녀를 욕보일 생각에만 몰두하고 있다. 양심 때문에 오는 망설임과 발각되면 영원히 지울 수 없을 오명에 대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루크레티아를 범하고 만다.

 

 

바로 자결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렇게 되면 어떤 오명이 덧씌워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루크레티아는 다음날 남편과 친정아버지에게 각각 편지를 보낸다. 소복을 차려 입은 루크레티아는 급히 달려 온 두 사람에게 타르퀴니우스가 저지른 일을 모두 말하고 반드시 복수해 줄 것을 부탁한 다음, 그 자리에서 자결하고 만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들은 그녀의 시신을 로마의 광장으로 운구한 후, 그것이 타르퀴니우스의 소행임을 시민들에게 알린다. 그렇지 않아도 누군가가 내몰아 주기를 바라던 폭군의 아들이 그런 악행을 저지른 것에 분노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왕과 그 일족을 몰아내고 로마를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꾼다. 셰익스피어의 설화시(說話詩) ‘루크리스의 능욕(The Rape of Lucrece)’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양심을 어기는 행위는, 그것이 무엇을 추구하는 것이든 “한순간의 만족을 위해서 영원을 저당 잡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무언가에 대한 욕망이 솟구칠 때 바로 작동시켜야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동안 후회하는 것은 물론이고, 타르퀴니우스처럼 천년만년 동안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오명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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