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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바틀비! 아, 휴머니티(Huma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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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바틀비! 아, 휴머니티(Humanity)!”
  • 이환태
  • 승인 2017.03.24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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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태의 인문학산책] <6>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고등학교 1학년 때로 기억된다. 같은 반에 호리호리한 체구에 도시 아이처럼 얼굴이 하얗고 손가락이 가느다란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는 언제나 우수에 젖어 있었다. 미소 짓는 일은 매우 드물었고, 가끔 자조 섞인 투로 말하며, 자주 슬픈 노래를 부르곤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마치 이 세상에 대해 어떤 미련도 없는 것 같은 태도였다.


세상이 그에게 어떤 짐을 지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아주 예민한 감수성으로 세상을 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까스로 몇 달을 그렇게 교실에 나타나더니 얼마 후 그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당시의 학교 환경은 그 여린 가슴으로 감내하기엔 너무나 투박하기만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관습이 정해준 길을 별 의심도 없이 가고 있던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그 친구는 단호한 주관성을 가지고 그 세상에 대해 외롭게 저항했다.


오래 전에 이름도 잊었고 얼굴 모습도 가물가물하지만, 지금도 그가 부르던 노래며, 그의 우수에 찬 모습이 가끔씩 떠오르면서 그게 무얼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궁금해지곤 한다. 이미 세상을 하직했을지도 모를 친구이지만, 그는 무엇인가 때문에 아파했고, 그걸 이해하려들지 않는 세상을 단호하게 거부한 사람이었다.


나중에 대학에 와서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단편소설 <필경사 바틀비>(Bartleby the Scrivener)를 읽었을 때 그 친구가 바로 주인공 바틀비와 같은 처지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월 스트리트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단편의 배경은 창문 아래로 무자비한 자본주의의 상징인 월 스트리트의 담이 보이는 19세기 뉴욕의 어느 변호사 사무실이다.

 

 

이 사무실에는 이미 각종 소유권 관련 소송에 필요한 서류를 베끼는 일을 하는 두 명의 필경사와 한 명의 사환이 있다. 지금이야 복사기가 있어 이런 사람들이 필요치 않지만, 당시만 해도 몇 십 페이지에 달하는 서류를 서너 부씩 일일이 손으로 써서 사본을 만들어야 했다. 법률 서류란 단 한 자만 틀려도 일이 크게 틀어지는 수가 있으니 이들은 그걸 베낀 후 꼼꼼히 교정도 해야 했다. 이 사무실은 이 하찮으면서도 피 말리는 일로 언제나 일손이 부족했다. 그걸 메꾸기 위해서 고용된 사람이 바로 바틀비였다.


처음 이틀 동안 그는 꼼꼼하면서도 부지런하게 서류의 사본을 만들었다. 그러나 사흘 째 되던 날 그가 베낀 사본을 함께 교정하자는 변호사의 말에 그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 황당한 대답에 어이가 없었지만, 그의 말투가 워낙 차분한데다가 교정 작업이 시급한지라 변호사는 다른 사람에게 그의 것마저 교정하게 하고 그날은 그냥 넘어간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 바틀비는 사무실 구석에서 창밖의 벽을 응시한 채 앉아 있을 뿐, 도무지 일을 하려들지 않는다. 다른 직원을 통해 일을 시켜도 보고 가까운 우체국에 심부름도 보내려 해 보았지만, 그에게서는 언제나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휴일 날, 갑자기 사무실에 들른 변호사는 바틀비가 거기서 기거하고 있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란다. 사태가 이쯤에 이르자 두려운 생각마저 든 변호사는 그 동안의 급료와 약간의 보너스를 주고 바틀비를 해고한 후 사무실을 옮겨 버린다. 그러나 며칠 후 건물 주인에게서 바틀비가 그곳에서 꼼짝 않고 있으니 와서 데려가라는 연락이 온다. 측은한 생각이 든 변호사는 그를 자기 집에서 기거하도록 제안도 해 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결국, 경찰이 와서 그를 부랑인 수용소로 데려간다.

 

 

한참 후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감옥 마당에서 벽을 응시한 채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변호사는 그에게 사식을 넣어달라는 부탁과 함께 간수에게 약간의 돈을 주고 그곳을 떠난다. 그러나 며칠 후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 바틀비는 며칠 째 식사를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변호사가 다가가 그의 몸을 흔들었을 때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나중에 변호사는 바틀비가 자기 사무실에 오기 전에 수취인불명 우편물 처리소에서 해고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곳은 수취인이 이미 죽거나 행방불명되어 전할 수도 없고 발신인조차 알 수 없어 반송할 수도 없는 우편물을 처리하는 그런 곳이었다. 그곳은 조금만 일찍 도착하였어도 수취인이 죽지 않았을 수도 있을 온갖 가슴 아픈 사연을 담고 있는 우편물들을 모두 불에 태우는 일을 하는 곳이었다. 바틀비가 왜 식음을 전폐하고 결국 죽음의 길을 선택했는지를 안 변호사는 “아, 바틀비! 아, 휴머니티(Humanity)!”라는 말로 그의 이야기를 끝낸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 아픔 때문에 세상을 이미 더 받아들일 수 없는 지경에 있지만,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려 하기는커녕,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복사기의 버튼을 누르듯이 무정한 일들을 마구 시키지는 않는지 모를 일이다. 기계가 아닌 이상, 그저 월급 주고, 밥 먹여주고, 재워 준다고 해서 할 일을 다 한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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