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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예수 탄생을 보는 혁신적 관점[이순구의 미술산책] <6>카라바조의 ‘목자들의 경배’

보수와 혁신은 모든 시대에 걸쳐 대립각을 세운다. 미술 분야에서 시대마다 사조가 생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보수 없이 혁신은 없다. 보수와 혁신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따라서 보수는 혁신의 근원이다. 연꽃처럼 진흙수렁에서 핀 꽃은 더 향기롭고 아름답다. 그래서 혁신은 시대의 꽃이다.


17세가 미술의 혁신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 이탈리아 화가가 있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다.


후대에 쓴 그의 전기를 보면 카라바조는 감성이 풍부했던 것 같다. 감정을 억제하지 못할 만큼 솔직한 표현이 넘친다. 그러나 그의 미술에 대한 집념과 천재성은 후세에 새로운 혁신으로 남아있다. 그가 주로 사용한 명암법에 대해 미술평론가인 로베르 롱기는 르네상스 시대에 발견된 원근법에 비유했다.


<목자들의 경배>는 중세의 많은 화가들이 남긴 것과 같이 아기예수의 탄생과 이를 경배하는 목자들을 그린 작품이다. 베들레헴의 외진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와 성모, 이를 경배하러 찾아온 목자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는 당시 다른 화가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인간 성모자(聖母子)와 목자들의 표정이 그려져 있다.


너무 낡은 마구간 구유에서 모진 산고로 탈진한 듯 비스듬히 기댄 마리아가 살포시 아기예수를 끌어안고 볼에 뺨을 대고 있다. 힘에 부친 듯 숙인 마리아의 표정과 손동작에서 산고를 느낄 수 있다. 초라한 곳이지만 성스럽다.


아기예수의 탄생을 그린 다른 그림과 달리 이를 경배하는 목자들에게서조차 왕 중 왕을 경배하기 위한 화려한 옷차림을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 모양새다. 화면 중앙에 배치된 마리아와 요셉의 붉은색 옷을 빼고는 화려함이 없다.

 

 

당시 바로크미술의 화면은 소용돌이치는 역동적인 구성의 동세(動勢)와 범람하는 강물처럼 빛이 화면에 흘러넘쳐야 당연했다. 아기예수탄생을 경배하기 위해 금빛구름과 사랑스런 아기천사들의 무리가 감싸고 선물을 싸들고 오는 행렬이 등장해야 했다. 그러나 카라바조의 그림에는 아무것도 없다.


달빛에 드러난 성가족과 목자 셋의 모습을 보라. 이탈리아 바로크미술을 통틀어 이처럼 어둡고 쓸쓸한 그림이 어디에 있는가. 카라바조는 왜 성스러운 순간을 이토록 쓸쓸히 그린 것일까.


이 그림의 의도는 화면 중앙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리아와 아기예수의 상봉, 서로 뺨을 맞댄 바로 그 순간이다. 서로의 뺨을 맞대는 것은 고대 로마시대부터 죽은 사람과의 이별을 의미한다. 뻣뻣하게 굳은 라자로를 끌어안고 뺨을 부비는 막달레나, 또는 피에타의 마리아가 무릎위에다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뺨을 맞대는 장면은 종교미술의 역사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상징이다. 아기예수와 뺨을 맞댄 마리아도 마찬가지로 훗날 다가올 수난의 어두운 예감이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또한 허름하게 그린 양치기 목자들은 순수한 믿음을 뜻한다. 그 표정에서 이들이 바치는 예배의 경건함을 극대화시켰다. 참된 예배는 오래된 친구의 향기처럼 진실한 마음의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카라바조는 예수의 삶에서 기적과 일화를 걷어냈다. 종교라는 이름의 달콤하고 신비스런 환상이 덮고 있던 세속의 꺼풀을 벗고 순박하게 달려온 양치기의 순박한 시선으로 예수의 삶을 증언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 이병호 주교의 말씀이 떠오른다. “예수님도 그렇게 가장 쓸모 있는 소모품으로 세상에서 살다가 돌아가셨다.”


화가는 인간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삶을 시작한, 그리하여 가장 낮은 자리에서 탄생한 예수의 탄생 상황을 보탬 없이, 더도 덜도 아닌 그대로 그렇게 그린 것이리라.

이순구  webmaster@sj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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