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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보다 큰 슬픔, 잊힌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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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보다 큰 슬픔, 잊힌다는 것
  • 이환태
  • 승인 2017.03.17 11: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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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태의 인문학여행] <5>안톤 체호프의 ‘벚꽃 동산’

죽음보다 슬픈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죽은 후에 깡그리 잊히는 것이다. 죽음이 그저 사라지는 것이라면, 죽은 후에 잊히는 것은 어떤 이가 마치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되는 것이다. 평생 동안 이룩한 모든 것이 죽음으로써 수포로 돌아가는 것도 슬픈 일일진대, 그런 사람이 이 땅에 왔다 간 것조차도 모를 정도로 아주 잊힌다면 이보다 슬프고 허무한 일은 없을 것이다.


진달래꽃, 살구꽃,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이 다가왔다. 요즘은 벚꽃이 무리지어 핀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 대세이지만, 마을에 한 두 그루씩 서 있는 살구꽃, 벚꽃 또한 아름답다. 그런데 그게 누군가가 그 땅을 살다 간 흔적이요 자취라고 생각하면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그것을 거기다 일부러 심은 것도 귀한 것이지만,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그곳에 그렇게 서 있도록 놔둔 것도 보통의 일은 아니다. 특히, 수십 년 간 지속되고 있는 개발의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아름다운 것들은 그저 본래 아름다워서만이 아니라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이 깃들여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러시아의 작가 안톤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의 극작품 중에 <벚꽃 동산>(The Cherry Orchard)이란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의 배경은 벚꽃이 만발한 수백만 평의 과수원이다. 이 아름다운 과수원에서 한 때는 수많은 농노(農奴)들이 체리를 따고 그것으로 잼을 만든 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저 과거의 추억일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곧 누군가의 손에 넘어가 모두 베어질 위기에 놓여 있다.


5년 전 남편이 죽으면서 여주인 라네프스키(Ranevsky)는 그곳을 떠나 파리로 갔다. 수년간의 파리 생활 후에 남은 것이라곤 새로 만난 사람들로부터 당한 사기와 배신의 상처, 그리고 분에 넘치는 소비에서 얻은 빚뿐이다. 이제 그 빚을 청산하기 위해 그녀는 벚꽃동산으로 돌아온다. 그녀의 그 처량한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만개한 벚나무의 늘어진 나뭇가지는 마치 선녀들이 하얀 너울을 쓰고 춤추는 것 같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실제로, 라네프스키는 그 아름다운 벚나무를 보며 오래 전에 죽은 자기의 어머니가 하얀 옷을 입고 걸어오는 환상을 보기도 한다.

 

 

과수원의 경매가 있기 직전, 로파힌(Lopakhin)이란 사람이 찾아와 그곳을 관광지로 개발하자고 제안하지만 라네프스키는 이를 단호히 거절한다. 로파힌은 바로 그 과수원에서 일하던 한 농노의 아들이다. 시대가 변하여 그는 이제 큰돈을 주무르는 개발업자다. 로파힌은 어렸을 적 그 과수원의 농노였던 아버지한테 얻어맞고 눈물 흘릴 때 여주인 라네프스키가 그의 눈물을 닦아 준 일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것은 잊고 싶은 아픈 추억일 뿐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라네프스키는 돈을 빌려서라도 과수원을 지키려 하지만, 다음날 열린 경매에서 그것은 속절없이 로파힌에게 넘어가고 만다. 라네프스키에게 그 과수원은 젊은 시절의 수많은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는 과거인 반면, 부자가 된 로파힌에게는 가난하고 무지했던 자신의 치부를 상기시키는, 그래서 아주 없애버리고 싶은 과거의 유산이다.


과수원이 경매로 넘어가자 그 동안 그곳을 지키던 식구들과 라네프스키는 눈물을 펑펑 쏟는다. 이제 그곳을 관리하던 사람들은 졸지에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야 한다. 농노해방정책에 의해 오래 전에 자유인이 되었으면서도 주인집을 떠나지 않고 평생 동안 과수원을 지키며 살다가 이제는 늙고 병들어 오갈 데 없는 노인 퍼스(Firs)를 식구들은 병원에 보내기로 결정한다. 모든 것이 대충 정리되자 라네프스키는 딸과 함께 서둘러 그곳을 떠난다.


그들이 떠날 때 멀리서 벚나무를 찍는 도끼소리가 들려온다. 로파힌은 벌써 그곳을 개발하기 위해서 벚나무를 베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 혼자 남겨진 병든 노인 퍼스가 등장하는데, 그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없다. 식구들이 경황 중에 그를 병원에 보내기로 한 것을 까맣게 잊은 채 떠나버린 것이다. 혼자 남겨진 퍼스는 자신의 존재가 발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 같다는 말을 한다. 그는 죽기도 전에 이미 잊힌 것이다.

 

 

그러나 잊힌 것은 퍼스만이 아니다. 좋든 싫든 그곳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자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 벚나무를 베어버리면서 로파힌은 단지 벚나무만을 베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존재했던 흔적도 함께 지운 것이다. 돌이켜 볼 때, 가난하고 무지해서 창피한 아버지였지만, 그런 아버지가 없었다면 현재의 자신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또한 자신의 과거의 흔적도 지운 것이다. 과거를 숨기거나 지운 사람들이 수상한 사람들이듯이, 로파힌은 평생 그런 사람으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많은 작가들이 아름다운 자연을 소재로 다루었지만, 그것의 아름다움만을 묘사하는 데에 머물진 않는다. 훌륭한 작가들은 항상 그것을 무언가 다른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한다. 체호프도 벚꽃 동산을 좁게는 등장인물들의 과거를, 넓게는 러시아를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했다. 아름다운 것은 그저 아름다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워즈워스가 말한 이른 바 ‘내면의 눈’인 마음으로 보면, 거기에는 그것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마음이 더해져 있다. 그러기에 누군가가 먹다 버린 개복숭아 씨에서 나온 나무라도 함부로 베어내선 안 된다. 우연히 거기에 있게 된 한 그루의 나무도 그것을 그냥 거기에 있게 놔둔 사람들이 살다 간 흔적이기 때문이다.


올 봄에는 사람들 북적대는 데 가지 말고 외딴 곳에 홀로 선 벚나무 아래에서 ‘내면의 눈’으로 그런 흔적을 더듬는 벚꽃놀이를 하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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