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뒤에 숨은 육체적 욕망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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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뒤에 숨은 육체적 욕망의 축제
  • 박한표
  • 승인 2017.03.17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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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표의 그리스·로마신화 읽기] <15-2>야누스의 얼굴 가진 술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이다. 인간에게 술을 선물했고, 포도나무와 와인을 관장했다. 술에 취하게 하는 힘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모든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신이기도 하다. 죽음에서 부활한 구원의 신, 생명력의 신, 즐거움과 잔인함이 공존하는 도취와 쾌락 그리고 광기의 신이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의 허벅지에서 태어난 신이다. 제우스의 몸에서 태어난 신은 둘이다. 하나가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지혜의 여신 아테나이고, 또 하나가 디오니소스다. 디오니소스의 아버지는 신이고, 어머니는 인간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신이 술의 신이라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가 술을 잘 마시면 모든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어 신의 세계를 맛보지만, 술을 너무 많이 마시거나 잘못 마시면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누가 뭐래도 술의 첫 번째 기능은 취하게 만드는 데 있다. 이성을 마비시키고 도취와 광기에 빠지게 한다. 누구나 취하기 위해 술을 마신다. 취하는 목적은 해방되기 위해서다. 술은 현실의 고통과 번뇌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주는 고마운 친구다.


그리스 신화에서 술의 기능은 한겨울 어두운 밤에 열리던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엿볼 수 있다.

 

 

초창기 디오니소스를 추종하는 신도들은 주로 여성들이었다. 디오니소스 여신도들을 ‘마이나데스(Mainades)’라 불렀다. ‘미친 여자들’이란 뜻이다. 그것은 ‘광기’란 뜻의 영어 ‘매드니스(madness)의 어원이기도 하다. 당시 여성들은 사회적 약자로서 노예나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하는 디오니소스를 삶의 은인으로 여기고 열렬히 추종했다.


디오니소스 신도들은 집을 버리고 무리를 지어 산과 들을 누비고 다녔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도취의 상태에서 야간 집회를 가졌는데, 이때 횃불과 디오니소스의 지팡이 티르소스(Thyrsos)를 미친 듯이 흔들고, 팀파론(Tympanon)이란 작은 악기를 열정적으로 흔들어 댔다. 그리고 마음속의 모든 한을 토해내듯 발악하고 광란의 춤을 추었다.


술의 두 번째 기능은 우리들의 본능, 특히 동물적인 욕망을 자극한다는 데 있다. 술과 육체적 본능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술을 마시면 이성의 통제력이 약해지고 숨겨진 동물적 욕망이 꿈틀거린다. 그래서 술에 취하면 성적 유혹에 쉽게 빠진다.


디오니소스 축제 때 신도들은 가면을 썼다. 가면 뒤에 숨은 인간에게는 모든 금기가 사라진다. 평소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대담하게 행동한다. 그래서 디오니소스 축제는 난잡한 집단 성행위로 끝을 맺는다. 술은 이성의 가면 뒤에 숨겨진 인간의 야수성을 드러내게 한다.


그러나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뜻하는 바는 단지 도취에 빠지고, 동물적 본능이나 분출시키는 것에 그치지는 않는다. 그것의 참된 의미는 창조성에 있다. 창조력이 결여된 도취는 광기가 아니라 객기다.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방종으로 흘러갈 뿐이다. 술은 파괴력과 창조력을 한 몸에 담고 있는 야누스적 존재다. 잘 쓰면 약이 되고 잘 못 쓰면 독이 된다.

 

 

술은 한 자루의 칼이다. 카오스(혼돈)의 웅덩이다. 술을 단순히 취하려는 목적으로만 마시지 말라는 뜻이다. 술을 통해 다시 부활하라고 말한다. 이는 술과 함께 일상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아를 잊은 망아(忘我)의 상태로 들어간 뒤, 그 망아의 정점에서 생성과 소멸이 곧 하나인 자연의 이치를 깨달으라는 것이다.


우리 또한 자연의 한 씨앗임을, 한 씨앗으로 태어나 한 생을 살고 갈뿐이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얘기다. 그러니 속세의 욕망과 고통에 얽매여 괴로워할 것도 없다. 그저 겸손히 자연의 도도한 흐름 속으로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봄이 오면 나의 죽음을 딛고 또 다른 씨앗이 꽃을 피울 것이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 신도들은 축제의 막바지에 이르러 엑스터시(황홀경)에 빠져 대지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환상을 본다. 산 짐승을 갈기갈기 찢어 미친 듯이 살과 피를 먹어치운다. 그리고 무아지경(無我地境)의 절정에서 탈진 상태에 이르도록 춤을 추다가 쓰러진다.


이들이 맛보려는 것은 죽음이다. 죽음은 자연으로부터 이탈한 개체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고 대자연의 도도한 흐름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의 세계로 통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것이 디오니소스가 퍼트리고 싶어 했던 종교이고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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