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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속 세상과 밖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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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속 세상과 밖의 세상
  • 이환태
  • 승인 2017.03.08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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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태의 인문학여행] <2> 김주영의 ‘홍어’

밤늦은 시간, 창밖을 보니 조용히 눈이 내린다. 이렇게 눈 오는 밤이면 김주영의 소설 <홍어>가 생각난다. 이 소설은 그 시작은 물론이고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배경에 눈이 내리는데, 그것도 아주 많이 내린다.

 
읍내 주막집 주인의 여자와 눈이 맞아 마을에서는 살지도 못하고 고향에서 쫓겨 난 남편, 그 남편을 기다리며 사팔뜨기 아들과 함께 삯바느질로 모진 인생을 살면서도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던 주인공의 어머니, 6년간의 기다림 끝에 돌아온 남편과 하룻밤을 지낸 그 어머니는 어쩐 일인지 다음 날 새벽 하얗게 내린 눈 위에 거꾸로 신은 고무신 발자국만을 남긴 채 집을 나가버린다.


오랜 세월 동안 그녀의 삶을 온전히 지배했던 마음속의 남편이 6년 만에 돌아와 옆에 누워있는 실제의 남편과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판이하게 다른 마음속의 세계와 마음 밖의 세계가 단절되고 고립되어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눈이다.

 
오랜만에 어릴 적 친구를 만난 사람들은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우연히 마주친 어릴 적 함께 놀던 친구, 수십 년 만에 만나고 보니 그가 내 마음 속에 있던 예전의 그 친구가 아닌 것에서 오는 당혹감과 마치 생면부지인 것 같은 사람이 자신을 친구라고 부르는 데서 오는 불편함 때문에 그와 서둘러 헤어진 경험 말이다.

 
눈 내리기 전의 세계와 눈 내린 후의 세계가 판이하게 달라 보이는 것처럼, 어찌 보면 인간은 마음속의 세계와 마음 밖의 세계, 이 두 세계에 걸쳐 살면서도 언제나 다른 한쪽을 잊고 있거나 담을 쌓은 채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먹고 살기 바쁜 와중에도 문학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것이 종종 그 두 세계를 보여주고 우리의 망각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일상의 피상성이 지배하는 삶의 세계와 그것에 가려져 말살되어버린 순수한 삶의 세계를 좀 더 통렬하게 대비시켜 우리를 각성시키는 예로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이라는 소설이 있다.


지방을 전전하는 박봉의 공무원이던 이반은 세상의 어떤 일도 한 장의 공문서 양식에 담을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몸에 밴 사람이다. 그에게 현실의 문제 따위는 그저 직장의 일을 핑계로 도외시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빠듯한 생활의 압박에 시달리는 그를 구원해줄 만큼 그의 직장생활이 잘 풀리지 않자, 그는 그의 참 현실로부터의 피난처와 같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출세한 대학 친구의 도움으로 페테르부르크의 법원에 취직을 한다.

 
이전보다 나은 급료를 받게 되면서, 그는 새 집을 장만하고 그것을 우아하게 - 실은, 번지르르하게 - 꾸미는 데 온 정성을 기울인다. 그러나 커튼을 걸다가 창틀에 옆구리를 부딪친 것이 탈이 나면서 그는 몸져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병세가 악화되면서 죽음에 대한 불안은 커져만 가는데, 그걸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그의 주변엔 아무도 없다. 그가 전에 그랬듯이, 그의 아내와 딸은 그저 피상적 관계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 그를 간병하던 하인만이 그의 신체적 고통을 이해하고 그걸 완화해주려 할 따름이다.

 
그가 죽자 신문을 통해서 그의 부음을 접한 그의 동료들은, 그게 자신들의 죽음이 아닌 것이 다행이라는 것과 그의 사망으로 생긴 빈자리를 자신 주변의 누구로 채울 것인가에만 관심을 둘 뿐,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일조차 번거롭게 생각한다.

 
퇴근 후 항상 모여 카드놀이를 즐기던 친구들이었고, 그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예절이나 규범을 잘 지키는 것만으로 참다운 관계가 유지되는 줄 알았지만, 막상 죽음이 닥치자 그런 것들은 모두 그의 장례절차만큼이나 형식이요 겉치레에 불과했음을 이 소설은 잘 보여준다.

 
우리에게는 마음 안팎의 세계가 모두 중요하다. 온통 은세계를 만들어놓은 눈 내린 풍경 못지않게 삭풍과 앙상한 나무 가지와 음산하고 을씨년스러운 도시의 풍경도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삶의 터전인 것처럼, 두 세계에 적절한 무게를 두는 것은 조화로운 삶의 기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둘 중 한 세계에만 가치를 둔 채, 다른 세계의 가치를 의식·무의식적으로 도외시한 사람의 삶은 결국 허무에 빠지기 쉽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가 그렇게 살다가 허무한 죽음에 이르게 된 경우인데, 그는 죽기 직전에 “우리의 어제는 모두 바보들에게 진토(塵土)의 죽음에 이르는 길을 비춰주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두 세계 가운데 오로지 한쪽에만 몰두하는 사람이 바로 바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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