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댓글
변상섭, 그림속을 거닐다
세종시교육청 공동캠페인
빈궁한 화가의 ‘사치스런 찰나의 행복’
상태바
빈궁한 화가의 ‘사치스런 찰나의 행복’
  • 정은영
  • 승인 2017.01.20 15: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은영의 미술사산책] 르누아르의 ‘선상파티의 점심’

수년 전 워싱턴 DC의 필립스 컬렉션(The Phillips Collection)이라는 미술관에서 박사 후(後) 펠로우로 있었던 시절의 일이다. 매서운 바람이 불던 겨울 어느 날이었다. 간단한 점심을 마친 후 인근 주택가를 산책하던 나에게 한 모자(母子)가 다가와 미술관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휠체어에 탄 노모(老母)를 모시고 온 중년의 남성은 어머니가 르누아르의 그림을 꼭 보고 싶다고 하셔서 아주 멀리에서 그곳까지 찾아왔다고 덧붙였다. 르누아르라는 이름을 말하는 아들의 입가에 미소가 퍼지는가 싶더니 동시에 노모의 얼굴에도 밝은 웃음이 활짝 피었다.


먼 길을 떠나 그들이 보러 온 것은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가 그린 ‘선상 파티의 점심(Luncheon of the Boating Party)’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항상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그림들이 있다. 그런 그림들은 심오한 철학을 다루었다거나 미술의 역사에 혁명적인 획을 그었다거나 하는 거대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삶의 행복한 순간을 따뜻하고 정겹게 그려 놓았다는 일견 소박한 이유에서 많은 이들로부터 변함없는 사랑을 받는다. ‘선상 파티의 점심’은 그런 그림 중에서도 단연 으뜸을 차지하는 작품이다.

 

 


‘선상 파티의 점심’은 1880년 파리 근교 샤투 섬(le de Chatou)의 선상 레스토랑에서 한가롭게 일요일 오찬을 즐기는 이들을 그린 것이다. 당시 파리 시내에 작업실을 두고 있던 르누아르는 생제르맹 행(行) 기차로 불과 20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던 이곳 샤투를 그 어느 곳보다 좋아했다. 훗날 그가 ‘그리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들을 맘껏 그릴 수 있는 곳’이라 회고했던 푸르네즈 레스토랑(La Maison Fournaise)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그림에 담긴 선상 레스토랑이다.


선상 레스토랑의 한쪽 테라스에 행복한 파리지앵들이 모여 있다. 햇빛을 가리는 차양 아래로 그림의 왼쪽 상단 저 멀리 엷은 하늘색의 센(Seine)강이 아스라이 보이고 그 뒤로 이들이 타고 왔을 기차가 다니는 철교의 다리가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


테라스에 모여 일요일 한낮을 즐기고 있는 이들은 실제로 르누아르와 가까웠던 친구들과 미술계 지인들이다. 보헤미안과 부르주아, 여배우와 사업가, 화가와 비평가 등. 이들이 누구인지 그 이름 뿐 아니라 출신과 직업까지 상세히 알려져 있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덧 나 자신도 익숙한 그들 사이에 끼어 선상 파티를 즐기고 있는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림의 전경(前景)은 청춘을 발산하는 젊은이들이 차지하고 있다. 전경의 왼쪽과 오른쪽에 하얀 민소매 티셔츠를 입은 이들은 각각 이 푸르네즈 레스토랑 사장의 아들인 알퐁스 푸르네즈와 인상파 화가 중 드물게 부유한 가문이었던 구스타브 카유보트다. 샤투의 센강에서 노 젓기(漕艇) 스포츠를 즐기던 젊은이들답게 뱃놀이 밀짚모자를 쓰고 건장한 팔뚝을 드러낸 상태다.


초여름으로 추정되는 계절이지만 당시 대부분의 도시인들은 후경에 보이는 것처럼 점잖게 정장을 차려 입고 멋들어진 실크해트나 중산모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이들의 복장이 얼마나 자유분방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새하얀 티셔츠의 젊은이들 옆으로 진한 청색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들이 앉아 있어 경쾌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특히 시선을 끄는 이는 귀여운 강아지에 흠뻑 빠져 있는 젊은 아가씨다. 몇 년 후 마담 르누아르가 되는 알린 샤리고(Aline Charigot)다. 부르고뉴에서 파리로 상경, 재봉사로 일하던 스물 한 살의 이 소박한 처녀에 대한 르누아르의 사랑이 부드러운 붓질과 화사한 색채에 그대로 묻어난다.


그러나 이런 행복한 정경을 그린 르누아르가 그림에서처럼 부유하고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리던 ‘잘 나가는’ 청년 화가였으리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당시 르누아르는 이미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중년이었고 게다가 여전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빈궁한 화가였다. 거의 십 년 가까이 그려온 인상파 회화로 얻은 것이라곤 혹평과 조롱뿐, 부나 명예는 요원한 것이었다.


선상 레스토랑에서 즐기는 여유롭고 풍요한 삶은 당시의 르누아르에겐 그야말로 스쳐 지나가는 아쉬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힘겹고 고단한 일상을 원망하거나 거기에 매달려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짧지만 아름다운 순간을 최대한 만끽하며 그 순간을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에 모든 정성을 쏟았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이 순간을 잡아라. 르누아르 그림에 담긴 삶의 비밀이다.


수년 전 추운 겨울날 ‘선상 파티의 점심’을 보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 왔던 그들도 아마 이런 삶의 비밀을 체득한 사람들이었으리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