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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에 남은 박정희대통령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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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에 남은 박정희대통령의 흔적
  • 이길구
  • 승인 2016.10.11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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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구박사의 계룡산이야기] <8>‘오송대(五松臺)’를 아시나요?

계룡산 유기(遊記)의 내용을 분석하면서 의외로 자주 등장하는 지명이 ‘오송대(五松臺)’이다. 계룡산을 말하면서 빠트릴 수 없는 것이 신도건설(新都建設)의 내력(來歷)이나 암·수용추 설화(說話), 그리고 동학사 등 3대 사찰(寺刹)에 대한 관심이다. 그런데 오송대는 잘 알려진 유적지(遺蹟地)도 아니고 더구나 명승지(名勝地)는 더욱 더 아니어서 유기의 작자들이 다수 거론(擧論)한다는 것이 선뜻 이해가 안됐다. 그냥 여행 로에 놓여 있는 하나의 쉼터 정도로 여겨질 뿐인데 말이다.

 

계룡산 유기는 왜 오송대에 주목했나

 

 

일반적으로 ‘오송대’라 함은 동학사에서 서북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계곡의 작은 언덕 위에 바위가 있고 큰 소나무 다섯 그루가 서 있다 해서 ‘오송대’라고 부르던 곳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오송대는 사라졌고 ‘오송대계곡’만 지명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필자는 오송대(五松臺)를 찾기 위해 지난해 여름 계룡산국립공원소속의 조성렬(60) 씨와 함께 나섰다. 계룡산에서 수십 년을 근무한 조성렬 씨는 계룡산 곳곳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계룡산 지킴이이다. 그는 오송대에 대해 확실하지 않지만 몇 군데 알려진 곳이 있다 하여 함께 찾아 나선 것이다.

 

오송대 가는 길은 동학사를 경유하여 오송대계곡을 통해 올라가는 길과, 남매탑을 지나 심우정사(尋牛精舍)에서 삼불봉과 관음봉 사이의 오송대로 가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이는 현재의 등산로 코스와는 달리 동학사를 경유하여 오송대 계곡을 거쳐 오송대를 반드시 거쳤다가 설봉(雪峰, 삼불봉)에 오른 후 상원암(上元巖)으로 내려오는 코스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당시에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오송대 차원을 넘어 사대부가 계룡산 산행을 하면 오송대를 반드시 찾고 거기에서 시(詩) 한 수(首)를 짓고 읊어야만 한다고 여긴 것 같다. 필자는 두 번에 걸쳐 오송대를 찾았는데 오송대계곡 코스는 고개 길로 힘들어서 심우정사코스를 소개한다.

 

남매탑(상원암)에서 우측인 서쪽으로 가면 2~3m 되는 축대 아래에 겨우 한 사람이 지나 갈만큼 좁고 길 아래로는 까마득한 벼랑이 나온다.(사실 이 길은 필자가 오래전에 다녔던 길인데 얼마 전 상원암 해우소에서 이 길을 찾았는데 길이 봉쇄되어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절을 등지고 우측 길로 들어서면 모퉁이를 하나 돌자마자 또 다른 골짜기이고, 정면으로 바위 절벽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심우정사로부터 10분 정도 떨어진 거리이다.

 

절벽에는 10m 정도 되는 로프가 달려있고, 바위는 기암절벽인데 전형적인 키 작은 한국 소나무가 풍우(風雨)에 시달려 휘어진 채 바위 틈새에 10여 그루가 흩어져 서 있다. 바위 자체만으로는 자그마한 정원에 조경석과 소나무가 어우러진 형태이다. 바위 꼭대기에 서니 밑은 절벽이고 눈앞은 망망대해처럼 확 트인 전망과 저 멀리 천왕봉·마안봉·쌀개봉·천황봉으로 이어진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바로 이 바위가 오송대 라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이곳이 아니고 삼불봉 쪽으로 좀 더 올라가면 사람이 살고 있던 흔적이 나오는데 이곳 일대가 오송대라고도 한다.

 

오송대라고 추측할 만한 곳이 여럿 있는데 다섯 그루의 큰 소나무도 안보이고 누각도 없어 현실적으로 어느 곳이 오송대가 있었던 곳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여러 흔적이 남아있어 전문가의 간단한 지표조사만 해봐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오송대계곡과 석각(石刻)

 

오송대 계곡은 계룡산 7대 계곡 중 하나이다. 이 계곡은 관음봉과 삼불봉 가운데를 갈라 주는데 심우정사에서 이어진 길은 삼불봉의 8부 능선쯤 되는 곳과 연결된다. 오송대에서 계곡을 따라 하산하는 것은 무지무지 힘들다. 정상적인 등산로가 아니라 길도 없고 나무와 돌만 무성할 뿐이다.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어 간혹 길이 끊어진 곳도 있다. 발밑에는 작년에 떨어진 낙엽들이 사람의 발길이 별로 없어 원형 그대로 있다가 발에 밟히자, 바스락거리며 사각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

 

계곡 좌우 서너 곳의 석축 무너진 더미와 불타 까맣게 변한 흙이 있는 곳은 폐사지(廢寺地)의 흔적들이다. 어른 한 아름도 훨씬 넘는 벚나무에는 어린애 손목만큼이나 굵은 다래 넝쿨이 열대 밀림처럼 좌·우·아래로 늘어져 있다. 또 어떤 곳은 구멍 뚫린 밑동이 시커먼 속살을 내비치고 있고, 그 중간 중간에 집채만 한 바위, 작은 산만한 바위, 누운바위, 선바위, 납작하고 반반한 바위 등이 눈을 현혹한다. 이러한 바위들 옆에는 반드시 기도 흔적과 돌무더기가 있어 계룡산의 특징을 여실히 드러낸다. 사람의 손이 덜 간만큼이나 물은 맑고, 이끼 하나 없다.

 

계룡산의 명승 계곡에 비해서는 수량(水量)은 뒤지지만 나름 바위와 어우러진 모습은 그런 데로 괜찮다. 계곡 끝을 50m 정도 남겨놓고 널찍한 바위 위에 앉아 땀을 식히느라 휴식하며, 무심코 아래를 보니 무슨 글자 같은 것이 새겨져 있다. 가로 2.2m, 세로 3.5m 정도의 약간 경사진 바위에 글자는 하늘을 향해 있다. 흐르는 물을 손으로 떠서 글자 위에 부어 본다.

 

 

놀라운 글자가 필자를 현혹한다.

 

萬國活計南朝鮮 文明開花三千里 領導朴瞻濟(만국활계남조선 문명개화삼천리 영도박첨제)

黃牛如正熙將守 道術運通九萬里(황우여정희장수 도술운통구만리)

 

32자(字)가 4줄로 되어 세로로 새겨져 있는데 해석해보면 원래 원문은 증산도의 교리인 「도전(道典)」 의 한 내용을 응용 한 것이다.

 

만국활계남조선(萬國活計南朝鮮) 청풍명월금산사(淸風明月金山寺)

문명개화삼천국(文明開化三千國) 도술운통구만리(道術運通九萬里)

 

이는 “만국(지구상의 모든 나라)을 살려낼 활방(방법과 계획)은 오직 남쪽 조선(대한민국)에 있고, 청풍명월은 금산사이다. 문명이 온 세상에 활짝 열려 도술이 곳곳에 가득하리라.” 대략 이런 뜻인데, 중간에 영도박첨제(領導朴瞻濟)와 황우여정희장수(黃牛如正熙將守)란 글귀를 집어넣었는데 이를 다시 해석해보면, “만국(지구상의 모든 나라)을 살려낼 활방(방법과 계획)은 오직 남쪽 조선(대한민국)에 있고, 박첨제가 이끌어 나갈 것이며, 황소 정희장군과 같은 분의 도술이 곳곳에 가득하리라”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종합해보면 이 글자의 의미는 아마 박정희 대통령과 관련이 있음이 틀림없다. ‘황우’는 ‘황소’로 박 대통령이 소속되었던 공화당의 상징으로 ‘박 대통령이 정치를 잘 하여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는다는 의미’와 다소 연관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글들은 박 대통령에게 냉대 당하며 한 평생을 한스럽게 살다간 첫째 부인 김호남(金浩南, 박 대통령의 큰 딸 朴在玉의 생모)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그는 이 계곡 어딘가에 있던 암자에서 보살생활을 하다가 대전에 있는 한 절에서 기거하다 경상도로 내려갔다는 사실이 구전되고 있다. 그녀는 계룡산 운(運)과 기(氣)를 받아서인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도 남편을 원망하지 않고 잘되기를 기원하면서 바위에 이런 글을 새겼다 한다. 더 이상의 추적과 사실 확인은 하지 못하고 누군가에 의해 진실이 밝혀지리라 믿으며 미제(未濟)로 남겨 놓는다.

 

그리고 필자가 해석한 것은 오직 필자의 견해일 뿐 사실이 아니니 진실로 오해하시지는 마시라. 사족(蛇足)을 들이댄다면 계룡산에 남아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영혼(靈魂)이 딸에게 전달돼 현재 대통령을 하고 있다면 너무 과장(誇張)된 것은 아닌지. 아무튼 이것이 사실이라면 김호남 보살의 신기(神氣)는 대단한 것임은 분명하다.

 

택반록(澤畔錄)에 남긴 오송대

 

다시 조익의 계룡산유람에 대해 더 알아보자. 그는 계룡산 주변을 유람하고 많은 시(詩)를 택반록(澤畔錄)에 남겼는데 특히 ‘오송대’에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정리한 시가 있다.

 

등오송대(登五松臺)

 

몇몇 노승의 안내로 비탈길에 오르자, 자루처럼 일어나 구름 밖으로 솟구친 높은 언덕이 있다. 산 안의 멀고 가까운 빼어난 곳들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오송대’라고 한다. 세 자의 큰 글씨로 된 편액은 한호(韓濩, 韓石峯, 1543~1605)의 글씨다. 암자는 텅 비어 쓸쓸하고 섬돌 가득 낙엽만이 구른다. 스님들이 들려주는 지난날의 유래가 허무맹랑하여 믿을 수가 없다. 마침내 소나무들 사이로 뿔뿔이 흩어져 앉아 술잔을 들어 마시면서 시 몇 수를 이어짓다.

 

(老釋數輩, 引我過石, 有岸斗起, 聳出雲外. 內山遠近之勝, 一擧而盡得者, 曰五松臺. 扁有三大字, 卽韓濩筆. 空菴寥落, 黃葉滿階. 僧言舊日興廢事, 荒誕不可徵. 遂散坐松間, 擧酒引觴, 聯詩數章.” 번역은 추만호, 『東鶴寺』, pp. 233~234 참고.)

 

 

스님의 방이 아주 깊은 산속에 있으니(蓮房住在翠微中)

놀랍구나 높은 누대 공중에 기댄 것이(驚高臺倚半空)

지난 일 아득한데 그 누가 기억하리(往事微茫誰記得)

감실에서 눈썹 흰 노인을 마주하였네(一龕相對雪眉翁)

 

산중의 해는 일찍 지는 법이라. 서늘하여 더 머물 수가 없다. 각자 옷깃을 떨치고 북쪽 산기슭으로 나아가니 저물녘 산에 어리는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이 안개처럼 깔려 앞 봉우리를 끊어 덮는다. 뒤돌아보니 오송대로부터 겨우 수십 걸음을 왔을 뿐이거늘 길이 아예 분간되지 않는다.

 

<“山日易西. 凜不可留. 因各振衣步出北麓, 嵐翠微, 鎖斷前峯. 回望松臺, 僅隔數十步, 而來路已不可分.” 번역은 추만호, 『東鶴寺』, pp. 234~236 참고.>

 

찬바람 겨드랑이 간지럽히며 높은 산 내려와(風駕腋下崔嵬)

긴 숲 다 지나 이끼 낀 바위에 앉으니(度盡脩林坐石苔)

단풍나무와 흰 구름이 서로를 비추는데(紅樹白雲相掩映)

뒤돌아보니 오송대는 이미 사라졌어라(回頭已失五松臺)

 

당시 오송대에 암자가 있었고 암자에는 세 자의 큰 글씨로 쓴 편액(扁額)이 있었는데 이 글씨가 그 유명한 한석봉(韓石峯, 1543∼1605)의 작품이라고 전한다. 암자는 다른 것처럼 텅 비어 있어 쓸쓸함을 전하는데 무슨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스님들이 들려주는 지난날의 유래(由來)가 허무맹랑(虛無孟浪)하다고 적고 있다. 당시 오송대 주변에는 단순히 소나무 다섯 그루와 바위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법 크고 아름다운 암자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암자는커녕 오송(五松)도 보이질 않으니. 세월의 흐름은 우리에게 영원한 것을 없게 만드는 신통력(神通力)을 지닌 것 같다.

 

조익의 계룡산기행 관련 기문은 400여 년 전 오송대의 실상을 잘 설명하고 있어 소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필자가 흔적 밖에 없는 곳을 구구절절(句句節節)하게 아 다니며 설명하는 이유이다. 또한 필자는 조만간 문화재청 등 관련기관과 협의하여 ‘오송대 위치 찾기 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이고자 한다. 계룡산을 사랑하는 독자님들의 적극적인 호응과 관심을 기대한다.

 

필자 이길구 박사는 계룡산 자락에서 태워나 현재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계룡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 산의 인문학적 가치와 산악문화 연구에 몰두하여 ▲계룡산 - 신도안, 돌로써 金井을 덮었는데(1996년)  ▲계룡산맥은 있다 - 계룡산과 그 언저리의 봉(2001년)  ▲계룡비기(2009년) ▲계룡의 전설과 인물(2010년) 등을 저서를 남겼다.
 
‘계룡산 아카이브 설립 및 운영방안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기록관리학 석사(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를, 계룡산에 관한 유기(遊記)를 연구 분석한 ‘18세기 계룡산 유기 연구’,  ‘계룡산 유기의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한문학 박사(충남대학교 한문학과)를 수여받았다. 계룡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지금도 계룡산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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