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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편입 청원군 부용면, ‘역사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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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편입 청원군 부용면, ‘역사 속으로…’
  • 세종포스트
  • 승인 2016.07.01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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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 7월 1일



○…청원군 부용면 사라져


충북 청원군 부용면이 2012년 7월 1일자로 세종시로 편입됐다.


이에 따라 이시종 충북지사(오른쪽 세 번째)와 이기용 교육감(오른쪽 두 번째), 이종윤 청원군수(왼쪽 첫 번째) 등은 2012년 6월 29일 충북 청원군 부용면사무소 현판을 뗐다. 사진은 당시 기관 및 단체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현판을 떼고 있는 모습. 


이곳은 100년간 불려지던 부용면 대신 ‘부강면’으로 바뀌며 세종시로 새롭게 출발했다. 


○…英 조차지 홍콩, 중국 반환


홍콩의 주권이 1997년 7월 1일 대영제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넘어갔다. 당시 중국 반환 당시 홍콩은 대영제국 최후의 유물 가운데 하나였다.


중국은 제1차 아편전쟁(1839~1842년) 결과 1842년 홍콩을 영국에 영구 할양했고, 제2차 아편전쟁(1856~1860년) 이후 카오룬 반도마저 1860년 영국령이 됐다.


1898년 영국은 홍콩과 그 주변 도서 및 해역을 아우르는 ‘신계(新界)’ 지역을 99년간 임차하는 내용의 협정을 맺었다. 이 영토는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됐다.


홍콩은 자유항구이자 대영제국의 무역 중심으로 무역 거상들에게 어마어마한 부를 안겨줬다. 이들은 부유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했으나 중국인 주민들과는 거의 교류가 없었다. 훗날 값싼 노동력 덕분에 홍콩은 주요 제조업 중심지가 됐다.


홍콩이 영국령이라는 사실은 중국인들의 민족적 자부심에 상처를 입혔다. 1960년대에는 중국의 홍콩 침공이 현실화될 뻔 한 적도 있었다. 1967년 국경 분쟁으로 중국군이 발포해 5명의 경찰관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홍콩은 중국 수출품의 방출구로 점점 그 역할이 중요해졌고, 1979년에는 이러한 이점을 한층 활용하기 위해 그 일대를 경제 특구로 지정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 홍콩은 금융과 은행 중심지로 더욱 중요해졌다.


임차 기간도 거의 끝나가던 1980년대,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는 홍콩의 미래를 논의하기 위해 중국 베이징을 방문했다. 1984년 홍콩을 비롯한 식민지 전 지역의 중국 반환이 합의되자 중국인들은 만족했다. 그러나 홍콩의 사법, 금융, 경찰, 관세 제도는 향후 최소 50년간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유럽공동체(EC) 출범, 그리고 영국의 탈퇴(?) 결심까지


유럽공동체(EC)는 유럽경제공동체(EECEuropean Economic Community),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European Atomic Energy Community)이 통합해 설립된 기구다. 1967년 7월 1일 출범했으며 이 셋을 묶어 유럽공동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평화와 경제 번영이 통합의 목적이었다.


EC는 공동의 통상 및 농업정책을 실시하고 관세동맹을 결성했으며 유럽통화제도를 마련했다. EC의 출발점은 ECSC의 창설을 위한 노력이었다. 프랑스와 서독, 베네룩스 3국(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및 이탈리아가 1951년 파리 조약을 체결하고, 이듬해 ECSC를 공식 출범시켰다.


이와 함께 ECSC를 관장할 초국가적 기구로 고등기관(집행부), 각료회의(입법), 공동의회(정책법안 심의), 사법재판소(분쟁 해결)가 설립됐다. 이후 EC 및 훗날 EU가 탄생하기까지는 여러 협약 및 조약 개정을 거치게 되지만 모두 그 기본모델은 ECSC였다.


EC는 1957년 3월 25일, 로마 조약을 통해 결성됐다. 이때는 유럽경제공동체(EEC)라는 이름이었다. EC는 창립회원국 6개국 외에 1973년 덴마크 아일랜드 영국이, 1981년에 그리스가 가입했다. 1986년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스웨덴, 핀란드, 오스트리아가 가입해 회원국이 모두 15개국으로 늘어났다.


그리스와 스페인 포르투갈의 가입 과정에서는 유럽의 남북 간 경제력 격차에 따른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후 1992년 2월 7일 EC 회원국들은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에서 ‘하나의 유럽’을 건설하기 위한 역사적인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유럽연합(EU)으로 확대 발전하게 됐다.


앞서 유럽 공동체에 가입을 거부했던 영국도 1973년 EEC(EU의 전신)에 가입하면서 유럽 통합에 첫발을 디디게 됐다.


하지만 독립국가로서의 정체성이 강했던 영국은 ‘반쪽 회원국’인 동시에 ‘반쪽 지위’를 갖고 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 왔다.


그리고 43년 만에 이번에 유럽 공동체 탈퇴를 결심했다. 영국은 유럽 공동체를 나가기로 한 첫 국가다. 전문가들은 유럽연합의 회의론 확산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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