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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과 ‘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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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과 ‘마망'
  • 유현주
  • 승인 2016.10.28 09: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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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미술 사이 | 마음의 집 하나쯤은 있어야


집을 박차고 나서는 여성,
집을 지어 자아를 확인하는 여성
공통점은, 누군가에 예속되지 않는 자기정체성


19세기 여성해방운동에 영향을 준 소설이 있다. 1828년 노르웨이에서 태어난 소설가 헨릭 입센이 쓴 <인형의 집 Et Dukkehjem>(1879)은 근대극의 효시이며 세계적인 페미니즘 희곡으로 등극되어 있다.


20대 초반부터 일찌감치 극작가의 길을 걸은 입센은 사회의 부정과 인간의 허위의식을 파헤치는 사회극들을 썼으며, <인형의 집>은 여성의 권리가 주어지지 않은 결혼생활이 얼마나 허위적인 것에 불과한지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나아가 이 소설은 단순히 남녀 간의 결혼이나 사랑의 문제만이 아니라 당시 여성들에 대한 고정관념, 사회적 지위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겉으로 봤을 때 노라의 가정은 행복의 표본처럼 보인다. 은행가 남편은 곧 은행 총재에 출마할 만큼 승승장구이고, 하녀를 두고 아이 셋을 키우면서 남편에게는 ‘종달새’처럼 지저귀는 마나님으로 사는 노라는 남부럽지않은 중산층 여성의 삶으로 비쳐진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형편이 어려웠던 시절, 남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할 돈이 필요해지자 노라가 남편 몰래 고리대금업자의 수표를 사용하기 위해, 죽은 부친의 서명을 위조했던 사실을 남편의 부하직원이 자신의 해고를 무마시키려는 카드로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남편의 직장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거나 언론에 노출된다면 남편의 사회적 체면은 말이 아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남편이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이 같은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다 해도 아내를 용서해주지 않을까? 그동안 남편을 위해 어렵게 빌린 돈을 혼자 갚아왔는데 오히려 칭찬받을 일이 아닌가. 이러한 실낱같은 기대는 결국 무참히 무너지고 만다. 비록 노라가 남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목적이었다지만, 현재 자신의 사회적 체면을 떨어뜨리고 승진을 방해하는 사건이라고 판단한 남편은 노라를 경멸하고 비난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음을 바꾼 부하 직원이 고소를 취하하자 남편은 우스울 정도로 다시 상냥해지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소설은 평상시 남편이 노라를 한 인격으로 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사랑이 없다면 이런 언어들은 여성비하로 인식될 수 있다. “저기 밖에서 지저귀는 건 종달새인가?” “우리 집 다람쥐가 언제 왔지?” “방해하지 말고, 샀다고 그랬어? 저거 저것 모두? 낭비꾼 작은 새가 밖에 나가서 또 돈을 다 써 버렸다는 말인가?” 노라는 자신이 그동안 남편의 종달새, 다람쥐와 같은 애완용 ‘인형’으로만 살아왔다고 판단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인형의 집’을 나가버린다. “나도 당신과 같은 사람이에요. 나도 이제 사람이 되려고 해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이 되려고 해요.”


이처럼 집을 나가버림으로써 상실한 자아를 찾으려는 여성상이 있는가 하면, 집을 지음으로써 여성 자신의 자아를 확인하고자 하는 여성 이미지가 있다. 프랑스의 세계적인 페미니즘 미술가 루이스 부르주아의 대표적인 작품 <마망 Maman>(1996)이 바로 그것이다.


높이 3.7m에 달하는 거대한 청동 ‘거미’는 루이스의 유년시절, 아버지와 가정교사 사이에 있었던 오랜 부정에 고통 받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기대와 달리 여자로 태어난 자신을 늘 혐오했던 루이스가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부단히 애쓴 결과물이다.


그런 이유로 ‘마망’은 여성에 대한 은유라고 할 수 있다. 폐기종을 앓던 어머니가 늘 태피스트리를 실로 짜듯, 거미는 삶의 고통을 인내하며 아름다운 창작물을 만드는 자신의어머니이기도 하고, 하찮은 천 조각조차 유용한 것으로 만드는 바느질처럼 자신의 집을 만들어내는 거미를 통해 여성성을 당당하게 표현한 루이스 자신이기도 하다.


‘인형의 집’이 여성의 현실을 인형에 빗대어 집 밖으로 여성을 끌어냈다면, ‘마망’은 여성 자신의 새로운 집짓기를 시도한 것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인형의 집’과 ‘마망’은 그러므로 서로 연결되어야 할 것 같다. 누군가의 인형으로 살기 싫다면, 독립하여 살 수 있는 ‘마음의 집’ 하나쯤은 있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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